[컨슈머와이드-박은주] "느그 과메기 모르제? 물미역이랑 싸서 초고추장 찍어먹으면 맛있다."
"아이고, 과메기야 서울에서도 다 먹지마는, 니, 조개로 국물 낸 나물탕국 먹어봤나."
명절에 고향에 갔다가 동아리방에 모인 친구들은 저마다 고향의 향토음식을 자랑했다. 성남에서 태어나 줄곧 서울에서 자라온 나는 한참을 듣고 있다가 한마디 던졌다.
"저기요. 잠시만요. 여기서 가자미식해 먹어 본 사람??"

가자미식해는 함경도의 향토음식으로, 건가자미를 양념해서 만든다. 의정부 외갓집에서 명절음식이라고 접시에 담긴 그 음식을 볼 때마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고춧가루 범벅으로 벌건 것이, 토막 난 가자미 사이 섞여있는 좁쌀들은 마치 생선알 부스러기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뼈까지 씹어먹어도 돼. 먹어보면 맛있을걸."
토란국에 흰밥만 연신 퍼먹으며, 젓가락을 어디로 놀려야 할지 모르는 나를 한참 바라보던 엄마는, 청소년 딸들에게 가자미식해를 강제할당했다. 시지근*하고, 물컹하고, 씹으면 엇구수*한 것이, 이걸 맛있다고 해야 하나 맛없다고 해야 하나. 가치판단은 뒤로하고, 엄마가 흰밥 위에 강제할당한 가자미식해 한 덩이를 대충 씹어 꿀떡 삼켰다. (*시지근하다 : 음식 따위가 쉬어서 맛이나 냄새가 조금 시금하다. /엇구수하다 : 맛이나 냄새가 조금 구수하다. - 출처 : 표준국어대사전)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가자미식해만큼 특이했던 건 할아버지 사투리였다. 명절에 곱게 분홍색 저고리 한복을 차려입은 할아버지는 허연 인절미를 씹을 때 말고는 도통 입을 여시는 법이 없었는데, 가끔 고개를 돌려 손녀인 언니와 나에게 뭐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분명 한국말인데, 우리가 알아들은 것은 "~하니?"라는 어미가 전부였다. 우리가 주저주저하고 있노라면, 고스톱 치던 엄마가 고개를 돌려, 할아버지가 방금 물으신 건 "모사니?(뭐더라?)", "너 이제 중학교 가니?", "이제 삼학년 올라가니?"같은 질문이었다고 통역해 주었다.
할머니의 말투는 그나마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동화 속에 나오던 푸근한 할머니와는 다른 특유의 직설화법으로 매번 손녀들을 띵하게 했다. 가령 할머니가 좋아하지 않는 류의 추석선물을 들고 오면 "아이고, 이거 가지고 오면 누가 먹니? 다 가져가라."라고 1초 만에 자신의 기호를 표시했고, 중학생이었던 내가 믹스커피를 타서 드리면 "이리 물을 많이 하면 어쩌니?"라며 물의 양을 품평했다. 할머니의 말투에 악의는 없었지만, 서울에서 나고 자라 부드럽게 말하고 간접적으로 의사 표현하는 습관이 있는 우리에게는 매우 냉랭해 보였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모두 지금은 북한에 속하는 북청 출신이다. 2000년대 초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금강산관광신청에 성공했고, 고향을 떠난 지 몇십 년 만에 휴전선을 넘었다. 돈만 마련하면 다시 넘을 수 있을 것 같았던 휴전선은 얼마 후 기약 없이 닫혔고, 의정부 외갓집은 더 이상 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며 가자미식해를 담갔다.

고향을 그리는 그 마음은 무얼까? 세 살부터 쭉 서울에 살았지만, 내 고향이 서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서울의 고층빌딩과 아파트, 플라스틱 놀이터는 왠지 고향이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았다. 엄마도 이렇다 할 고향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북청출신 부모의 피난통에 부산에서 나고, 서울 약수동 산중턱과 용답동에 살다가, 성남으로 이사했다가, 결혼해서 문정동까지 왔다. 지역적 연고가 수시로 바뀌는 사이, 엄마의 친가족 세 명이 연달아 하늘나라로 가고, 이어 할아버지까지 재혼하는 통에 엄마는 가족에게서도 마음의 고향을 찾을 수 없었다. 사랑과 푸근함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엄마는 때론 친구에게서, 음악으로, 산에서 푸근함을 발견하려 애썼고, 이제는 여행에서 삶의 안정감을 찾았다. 그런 엄마가 이번에 코리아 둘레길 중 해파랑길을 걷다 속초중앙시장에서 발견한 건 바로 북청출신 부모 아래서 먹었던 가자미식해. 속초는 한국 전쟁 당시 이북에서 내려온 함경도 출신 실향민의 또 다른 근거지가 되었다.
여행하다 시장에서 가자미식해만 보면 이끌리듯 맛을 보고 사 오는 엄마를 보면서, 문득 나도 가자미식해를 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채식주의자인 내가 먹을 수 있어야 하므로, 비건버전의 가자미식해여야 했다. 식해(食醢)는 곡물과 생선을 발효시키는 요리이므로, 생선의 단백질을 대체할 재료로 현대 북한에서 많이 먹는 인조고기를 구해보았다. 인조고기는 말만 고기지, 콩기름을 짠 후 남은 대두박(大豆粕) 가루를 먹기 좋게 뭉쳐서 건조한 재료다. 첨가물이 없고, 기름을 거의 짜낸 단백질만 존재하는 점에서 단백질의 비율이 높은 가자미와 유사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과거 북한-중국을 통해 한국까지 북한에서 생산한 인조고기가 유통되고 있었는데, 최근에는 북한산 인조고기의 유통이 끊기고, 국내에서 북한이 생산하는 인조고기와 유사한 형태로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고 한다. 즉, 내가 구한 인조고기는 국산 인조고기다.

비건용 가자미를 확보한 이후 가자미식해는 정말 뚝딱하고 만들어졌다. 좁쌀밥, 안 매운 고춧가루, 고운 엿기름가루, 소금을 섞고, 거기에 소금에 절여 물기를 제거한 무채와 물에 살짝 불린 인조고기를 나물요리하듯 살살 비벼주니, 보기에는 딱 그 외갓집에서 먹어본 가자미식해 모양이 나왔다. 물론 맛은 건두부 비빔과 비슷하다. 나의 요리에 너그러운 입맛을 가진 우리 집 유치원생 아들과 남편이 밥반찬으로 맛있다고 먹어주었다.

할아버지 할머니께 당신이 그리도 그리워하던 북청의 가자미식해를 요즘 꽤 힙하다는 비건버전으로 만들었노라고 까불거리고 싶지만 두 분은 이미 하늘나라로 가셨다. 아마 살아계셨다면, 할아버지는 쓱 보고는 대꾸도 없으실 테고, 취향이 확실하셨던 할머니는 이게 뭐니 하며 시식을 거부하셨을 테지만.
조부모세대의 북청은 북한이 아니었다. 대한제국 시절 강원도나 충청도 가듯 자유롭게 오고 가던 곳이었다. 언젠가 통일이 된다면, 엄마랑 손 꼭 잡고, 인절미 잡수실 때만 입을 열만큼 과묵하던 할아버지의 고향 북청에 꼭 가보고 싶다. 사진 속 젊은 청년이 친구들과 러닝 입고 수박 잘라먹던 곳이 이 계곡이냐고, 할아버지같이 "~하니?"라는 말투를 가진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느냐며... 어쩌면 나와도 인연이 있을 수 있었던 그곳에서 할아버지 고향 냄새를 맡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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