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주 작가 

[컨슈머와이드-박은주] '8만 원에 사과가 12개 있으니까... 사과 한 알에 6천6백6십 원이네.'
청과사장님과의 전화를 마친 내가 놀라서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어쩌다 보니 매년 거제도 시댁의 명절 과일 담당은 우리 서울막내네가 되었다. 누가 과일 사 오라고 요구한 적도 눈치 준 적도 없다. 다 내가 자발적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결혼해서 거제도 시댁에 가서 처음 놀란 것은 거제도 식구들이 후식을 참 많이 먹는다는 것이었다. 명절에 모인 식구들은 모두 삼시 세끼를 먹었는데, 매 끼니 후 과일과 믹스커피를 마셨다. 식구들이 열 명이 넘고, 모든 사람이 과일을 하루 3끼의 후식으로 먹으니 과일 소비량이 정말 어마어마했다. 과일값이 매년 오르는데, 저 많은 과일을 고정수입이 없는 시부모님이 다 부담하셔야 한다니 얼마나 부담되실까.

다음 명절이 되자, 나는 핸드폰으로 '가정용 배 10킬로', '보조개 사과 10킬로', '흠집 감 10킬로'를 거제도로 주문했다. 어차피 입으로 들어갈 거, 흠집 좀 있고 좀 덜 빨갛고 크기가 뒤죽박죽이면 뭐 어떤가. 맛만 좋으면 되지. 농부들이 대형마트에 납품할 과일을 고르느라고, 규격이 맞지 않거나 흠집이라도 나있으면 아무리 멀쩡해도 팔지를 못해 폐기처분 해야 한다는데, 과일 먹보들이 모여있는 시댁에 가정용 과일을 보낸다니 생각만으로도 보람찼다.

사과상자 (사진 제공 : 박은주 /출처 : 박은주 Bing Image Creator주문제작)

"매느리(며느리의 경상도 방언)! 느그 주문한 과일 3박스 오늘 왔다. 근데 니 과일업자한테 사기당한 거 아이가?"
며칠 후, 나의 과일상자를 받아본 시아버지가 과일 상태를 보더니 놀라서 전화가 왔다. 배는 검은 줄로 표면에 흠집이 나있고, 사과는 크기가 일정하지 않고, 단감도 표면이 살짝 터진 게 두어 개 된다는 것이었다. 우리 집에서는 주야장천 가정용 흠집 과일만 먹어서, 시아버지가 가정용 무선별 과일을 '사고(事故)'라고 생각하실 줄 상상도 못 했다. "아, 네." 하고 전화를 끊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시아버지가 흠집과일을 보고 놀라서 전화를 하신 이 상황에서 나는 몇 가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첫째, 흠집과일은 농부의 입장에서는 무선별 과일일 수 있지만, 소비자 입장에서는 하품(下品)으로 분류된다는 것이다. 규격에 맞지 않는 과일들은 의외로 소비자에게 노출조차 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이미 유통과정에서 규격에 맞지 않은 과일채소들은 탈락되어 도매상 판로에서 제외되기 때문이다. 마트에 진열된 과일들은 대형유통업자를 통해 다시 소매된 상태이기 때문에, 흠집과일이 마트에 진열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 나는 채식을 하면서 점차 농부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흠집과일을 알게 된 것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흠집과일은 사고인 것이다.

둘째, 명절과일은 조상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차례상에 올려지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능한 크고 아름다운 것에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제수용 과일로 택해지는 과일들은 탄저병, 기상이변, 장마, 무더위의 흔적이 전혀 없다. 늘 윤기가 좌르르 흐르고, 표면은 균일한 색을 지닌 게 하나의 완벽한 작품이다. 차례상에도 무선별과일도 올릴 수 있다고 생각한 건,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꽤 괘씸한 생각일 수 있겠다 싶었다.

셋째, 내가 보낸 과일은 시부모님께 '식량 부담'의 의미가 아닌 '선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나는 그저 과일 먹보들이 모여있는 시댁식구들이 마음껏 드시도록 각각 10킬로 가정용 과일 3상자를 보낸 것이지만, 시아버지 입장에서 이것은 서울에서 보낸 선물이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막내 매느리가 싸구려 선물을 보낼 리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시아버지의 세계관에 대해 생각해 보니, 나는 드디어 사람들이 왜 한 박스에 12개 밖에 안 들었으면서 6만~7만 원을 호가하는 과일을 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시아버지께는 일단 전화로 이번 과일은 그냥 먹고, 다음부터는 잘 알아보고 사야겠다고 둘러댔다. 명절이 되어 거제도에 내려가보니, 아버지는 제수용 과일을 따로 사셨고, 내가 보낸 무선별과일은 식후 디저트용으로 과일먹보인 시댁식구들이 둘러앉아 껍질 깎아 먹었다. 그게 며느리 3년 차의 일이다.

며느리 10년 차가 된 올해에도 남편과 나는 시댁 앞으로 과일을 시켰다. 물론 시아버지가 놀라지 않으시도록 '제수용 과일'로 선택했다. 대신 10킬로 3박스 보내던 과일은 특품이 되면서 용량이 많이 줄었다. 과일에 따라 2킬로, 많아야 4.5킬로짜리이며, 한 박스에 들어가는 과일의 개수도 10개 미만에서 많아야 12개 사이다.
올해 명절을 앞두고 가락시장 사과값이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뛰었다. 한 상자 8만 원이요? 그게 4.5킬로고 12개밖에 안 들었다고요? 놀라는 나의 목소리 앞에 청과사장님은 제수용 과일 앞에서 그게 뭐 대수라는 듯, 비싸면 배나 복숭아도 있다고 대안을 제시한다. 그렇다고 그 과일들도 그리 저렴하진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이번 사과 선물은 생략하고 다른 과일로 보내고 싶지만, 시아버지의 세계관을 존중하기에 8만 원짜리 사과를 선택했다.

특품사과와 못난이사과 (사진 제공 : 박은주 / 출처 : 박은주 Bing Image Creator주문제작

나도 참 많이 변했다. 20대 때는 내가 새로이 눈뜨게 된 가치들에 놀라 사람들에게 기회가 되면 말해주려고 했다. 내가 알게 된 그 사실을 사람들도 알면, 정말 그들도 나처럼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그러므로 새로운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굳건히 믿었다.
"농부들이 마트에 납품 못 하는 과일이나 채소는 팔지도 못하고 땅에 묻어버린대."
"사람마다 얼굴이 조금씩 다르게 생긴 것처럼, 텃밭해보면 과일과 채소도 전부 다르게 생겼잖아. 근데 다르게 생긴 거를 두고 못난이니, 보조개니, 꼬꼬마니 하면서 제값 못 받으면 농부가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
"선별과정이 참 고되대. 조그만 얼룩이 있어도 비품으로 분류된다고 살피고 또 살펴야 된대."
 하지만 사람들은 놀라지 않았으며, 알고 싶지 않아 했고, 알게 되어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런 순간들이 반복이 되었고 점차 나는 입을 다물게 되었다. 이제는 나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먼저 이야기하지 않으며, 그 어떠한 생각도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나의 삶 속에서 내가 눈 뜨게 된 가치들을 묵묵히 실천할 뿐이다. 내가 말한다고 사람들이 변하는 건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나 혼자 실천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변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사과 껍질 깎아서 드시겠지? 한 알 6천 원짜리인데, 도려내는 껍질만 봐도 가슴 아플 것 같아."
나는 퇴근한 남편과 마주 앉아, 방금 냉장고에서 꺼내 씻은 무선별 사과를 건네며 말했다. 농부에게서 직접 시켜 먹는 사과는 흠집도 있고, 크기도 제각각이지만 여전히 상큼하고 맛이 있다.
"그래, 우리는 이거나 먹자."
한 알 800원짜리 보조개 사과를 껍질채 한 입 문 남편이 말했다. 그래, 우리나 열심히 먹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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