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슈머와이드-박은주] "이미 다 끝났다. 어쩌지..."
퇴근한 남편 앞에 핸드폰 화면을 들이밀었다. 새벽 6시부터 밤 11시까지 모두 매진이었다.
"오늘부터 시작이었냐. 지난주부터 생각은 했는데 오늘인 줄은 몰랐네."
남편은 눈을 꿈벅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남편과 나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지금까지 뭐 하나 열의있게 줄을 서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서울숲 맛집거리 유명한 베이커리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도 '뭐 팔길래 저리 줄을 서지?' 하며 무심하게 돌아서고, 어린이집 추첨 대기인원이 100명을 넘어서면 '그냥 거기 보내지 말자.'라고 포기해 버린다. 누구 하나 빠릿빠릿한 사람 없는 우리 집은 늘 느렸고, 줄 서지 않아 보는 손해를 기꺼이 감수했다. 줄 한번 서지 않아도 그냥저냥 살 수 있었던 것은, 8월 29일 이전 세상에는 우리 같은 느림보를 위한 바늘구멍이 늘 존재했기 때문이다.

8월 29일 화요일, 뚜벅이 귀향인들만 아는 예매전쟁이 시작되었다. 8월 29일 실시간 검색어의 단연 1위는 타임시커. 콘서트표예매, 병무청, 인강, 기차, 버스, 비행기 등 치열한 예매전쟁이 벌어지는 사이트의 서버시간을 초단위로 알려준다. 발 빠른 예매의 달인들은 자신의 시계만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을 헤치고, 예매 사이트의 서버시간이 1초로 바뀌는 그 순간 클릭에 성공한다. 물론 타임시커 이용객보다 더 빠른 달인도 있다. 그건 바로 예매매크로를 이용하는 것인데, 서버시간이 바뀌건 말건 미리 설계해 둔 매크로로 무한 조회와 클릭을 반복진행하며 예매시도 횟수를 압도적으로 늘리며 예매 성공률을 높인다.
"지금 해도 소용없다. 어떻게든 다 된다."
혹시 모를 1장을 위해 앱을 무한 새로고침하고 있자니, 남편이 쓱 보고는 무심하게 한마디 한다.

"[1보] 10월 2일 임시공휴일 지정 확정... 황금연휴 6일 됐다"
8월 25일부터 슬슬 정부에서 10월 2일을 대체공휴일로 지정할지 여부를 검토 중이라는 뉴스가 돌더니, 8월 31일 오전에 임시공휴일이 확정되었다. 공식적으로 연휴가 길어졌으니 과연 버스예매현황에도 일말의 변동이 있었을까. 10시 30분 1 좌석, 13시 35분 1 좌석... 그 외에는 전부 매진. 거제도 뚜벅이 승객들의 귀향계획은 정부의 발표에도 굳건했다. 6일 연속 황금연휴에도 끄떡없다는 것은, 이번 추석 연휴에 거제도행 버스예매한 사람은 단순 여행객이 아닌 반드시 추석을 고향에서 보내겠다는 결의가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하기야, 거제도 며느리가 된 지난 10년 간 거제도에 내려가는 버스에 단순 여행객이 타는 경우를 많이 보지 못했다. 거제도는 뚜벅이 여행자들을 위한 관광인프라가 많지 않기 때문에, 렌터카 혹은 자차가 아니면 여행하기 힘든 곳이다. 여름방학에나 버스에 여행객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조금 타긴 했지만, 대부분 거제도행 버스에 탄 사람들에게는 여행객에게서 볼 수 있는 특유의 흥이 없었다. 휴게소라고 잠시 들르는 인삼랜드에서도 내리지 않고 좌석에서 수면을 취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내리는 승객조차도 여행의 정취를 즐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단순 허기를 채울 목적으로 핫바와 사이다캔을 사 와서 먹고는 금방 눈을 붙였다.
"기다려봐. 다 된다."
남편은 여전히 여유만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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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오후 3시로 3장 예매 성공'
이른 아침부터 남편의 문자메시지를 받고 예매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바뀌지 않을 것 같은 버스예매현황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9월 5일, 굳건할 것 같은 거제도행 버스승객들이 하나둘씩 표를 취소하기 시작한 것이다. 12시쯤 되자, 언제 버스표를 원했냐는 듯 거제도행 승객들은 미련도 없이 우수수 버스표를 취소하기 시작했다. 그날 아침 9시부터 기차 추석연휴 예매가 시작된 것이다. 거제도까지 닿는 철로가 없기에 기차표예매와 거제도 귀향은 무관할 것 같지만, 이동의 피로도를 단축하고 싶은 사람들은 부산까지 기차로 간 다음, 부산역에서 자신을 데리러 온 가족들의 자동차를 타고 거가대교를 건널 수 있다. 기차로 옮겨간 사람들 덕에, 남편도 그날 드디어 최종 아침 10시 우등표 3장을 예매 성공한다.

갑자기 공석이 우수수 떨어졌던 거제도행 버스예매현황은 오후가 되면서 급격히 공석이 없어지기 시작하더니 그날 밤 다시 전체 매진이 되었다. 순식간에 매진이 되어버린 기차현황을 조율하다가, 여의치 않자 다시 버스로 몰린 듯했다. 그날 밤 이후 현재까지 거제도행 버스는 다시 '매진'스티커로 도배되어 있다. 즉, 9월 5일 기차표 예매가 시작되었던 오전에 버스 공석을 노리지 않았다면, 거제도행 버스예매는 발권이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날 줄 서기를 극히 싫어하는 남편을 진정한 버스예매의 달인으로 인정했다. 타임시커도, 새벽 클릭질과도 거리가 멀지만 남편은 자신이 들어갈 때를 알고 있었다. 똑똑하고 재빠른 사람들끼리 경쟁하는 긴 시간 동안 빈둥대며 누워있다가, 일순간 공백이 생기면 여유 있게 기지개를 켜고 슬그머니 움직이는 전략, 대학생 때부터 연습해 온 20년의 예매 내공이 아니라면 가질 수 없는 여유다.
삶에서 급할 것도, 줄 설 것도 없는 나무늘보 남편 옆에서, 뒤쳐질까 조급하고 긴장했던 나도 점점 닮아간다. 여유 있게 하품이나 하고 있다가, 때가 되면 슬슬 움직이는 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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