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박은주

[컨슈머와이드-박은주] 해리포터의 킹스크로스역 9와 3/4 승강장처럼 지도앱에 존재하지 않는, 있으나 있지 않은 그런 곳이었다. 다행히 그곳에 다녀온 인생선배님들이 블로그에 찾아가는 법을 적어놓았다. 핸드폰에 블로그화면을 띄운 채, 머리만 살짝 빗고 집에서 입던 복장 그대로 집을 나섰다.
마을버스를 타고 한산한 거리에 내리니, 버스승객들이 모두 한 방향으로 걸었다. 서로 쳐다보지 않았지만, 그들도 나와 행선지가 같음이 분명했다. 건물로 들어서니 무시무시할 거라는 상상과 달리 깔끔한 접수대가 은행카운터를 연상시켰다. 신분증을 낸 후 대기실의 나무거치대에 모든 소지품을 놓았다. 지루한 긴장감이 맴돌기를 십 여분, 이름이 불린 사람들과 함께 좁은 복도를 따라 한 명씩 배정된 방에 들어갔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7분,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마이크 앞에서 우두커니 상대방을 바라보다 단숨에 시간이 흘러버렸다.

 

접견실 마이크 앞에서  (사진 제공 : 박은주 /출처 : 박은주 DALL-E 주문제작)

지도에도 존재하지 않는 그곳은 구치소였다. 군사지역처럼 지도에는 공터처럼 회색네모로만 존재하는 교정시설에서 그날 나는 허둥지둥 그렇게 최초의 수용자 접견시간을 흘려보냈다.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던 그 시간은 부채의식과 함께 살면서 종종 떠올랐다. 토네이도에 휘말리듯 순식간에 벌어진 일들로 그곳에 있었던 미결수 친구에게, 유리창 반대편의 내가 무슨 말을 건넸어야 했을까. 그런 생각들이 흘러 흘러 알고리즘이 나를 MC세이모의 '한 달에 한 번은 교도소로 가는 길'로 이끌었다.

"시청 앞을 뜸하게 오고 가는 '5번 버스'를 타고 도서관에 내려, 매번
(...) 지도 앱에서 나오지는 않았지. 주변 건물은 사무실 뭐 그런 거.
(...) 왜 왔는지 인사말을 건네고 무거운 철문까진 또 100미터
가방과 핸드폰 등 소지품은 맡겨둬. 내가 인성교육 강사라니 조금 어색해.

엠씨세이모의 경쾌한 랩을 들으며, 그날의 기억을 여러 번 되새김질하다가 문득 가사 한 줄이 팍 꽂혔다.
"우린 서로 다른 사연들을 지녔고 우린 서로 다른 노래들을 골랐어."
아. 엠씨세이모라는 사람은 교정시설에서 인성을 가르치기 이전에, 타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었구나.
래퍼 박하재홍(엠씨세이모)은 교정시설의 인성교육 강사다. 한 달에 한번 교도소와 소년원에 가서 음악감상을 통한 인성교육을 진행한다. "제주에서 가장 나이 많은 래퍼랍니다"하며 가볍게 주먹 쥐고 부딪혀서 인사할 때만 해도 어색해하던 재소자들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알려달라는 질문 앞에서는 진지해진다. 재소자들이 뽑은 노래는 같은 게 없다. '울고 넘는 박달재'부터 가수 자미로콰이까지, 자신이 왜 이 노래를 좋아하는지 설명하다 보면 강사와 재소자 간의 사회적 격차 없는 대화가 이루어진다.  

그의 여정이 궁금해져 이것저것 찾아보니, 그는 교정기관뿐만 아니라 2012년부터 힙합과 인문교양을 접목시켜 전국의 학생들을 만나고 있었다. 수업은 듣는 것부터 시작한다. 간단한 랩으로 자기소개를 끝낸 래퍼는 학생들에게 두고두고 들을 만한 음악을 추천해 달라고 한다. 추천곡은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래퍼는 아이들이 고민 끝에 작성한 추천 리스트를 진지하게 읽어나가고, 쭈뼛쭈뼛했던 아이들은 음악을 설명하다가 어느새 마음을 연다. 아이들은 음악 앞에서 순수한 감상자로 음악 자체에 흠뻑 빠져 즐길 줄 안다. 그중에는 자신의 감정을 랩으로 표현할 수 있는 아이들도 있다.
 

엠씨세이모의 학교 강연 ( (사진 제공 :박은주 /출처 : 엠씨세이모의 네이버 블로그)

경쾌하기 그지없는 그의 작품을 아무 생각 없이 듣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이해하게 된 가사에 꺽꺽 목놓아 운 적이 있다. 엠씨세이모가 힙합강연을 통해 청소년들과 교류하고 있던 2014년, 제주로 향하던 여객선이 침몰했다. 그 배에는 자신의 생각을 라임으로 표현할 수 있는 고등학생 래퍼도 타고 있었다. 배가 심하게 기울어져 제대로 서있기도 힘든 상황에서 김동협 군은 랩으로 답답한 감정을 강단 있게 뱉어냈다. 16살 래퍼의 마지막 라임이 담겨있는 핸드폰이 존재한다는 걸 알았을 때, 제주의 나이 많은 래퍼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아 한참을 망설였다. 마침내 마음을 다잡고 어린 래퍼의 음성을 들은 그는, 래퍼 술래와 함께 '천국에도 래퍼들이 있을까'를 녹음했다. 가사 속 동협이는 제주의 푸른 밤 동그랗게 모여든 사람들 가운데 랩을 하고 있다. 그런 동협에게 제주 래퍼는 천국을 항해할 수 있는 보물선의 키를 넘기며 묻는다. 천국에도 래퍼들이 있느냐고.

제주도 해변 아이들 앞에 나타난 보물선 (사진 제공 : 박은주 / 출처 : 박은주 DALL-E주문제작)

 

엠씨세이모의 랩들은 속도가 빠르지 않아 이해가 쉽고, 천천히 따라갈 수 있는 리듬도 편하다. 감정의 과잉도, 욕도, 디스도 없다. 다만 가슴을 쿵쿵 두드리는 진심이 지긋이 담겨있다. 처음에는 랩의 리듬과 멜로디가 신나서 듣다가, 가사까지 들리기 시작하면 순간 눈물이 또르르 맺힌다.

평소 듣는 음악이라고는 피아노 연주곡 밖에 없는 나 자신이 좋아하는 랩이 생겼다는 게 기뻐서, 은근슬쩍 가족들 다 듣는 블루투스 스피커나 언니의 자동차 스피커에 스리슬쩍 틀어놓기도 한다. 언니는 네가 안 어울리게 무슨 힙합이냐고, 남편은 또 그 사람 작품 틀었냐고 묻지만, 나는 뜨겁지만 무해한 랩들이 자랑스러워서 말한다.
"랩을 집중해서 들어봐. 여기 뜨끈한 무언가가 있다니까."

***** 에필로그 - 엠씨세이모의 '엠씨'가 뭔지 아시나요? 
래퍼들은 자신을 지칭할 때 엠씨OO이라고 소개하기도 합니다. 엠씨세이모의 작품만 들었지 힙합의 힙도 모르는 저는 이번 글을 쓰면서 엠씨의 뜻을 찾아보았습니다. 엠씨는 진행자(Master of Ceremony), 마이크를 쥔 자(Mic Controller) 등 여러 의미로 해석되지만, 랩으로 사람들과 소통하는 'Move the Crowd'의 뜻도 지닙니다. 엠씨의 영문은 MC와 emcee가 있는데, 엠씨세이모는 무대를 이끌기보다, 사람들의 대화를 불러내고 싶기에 대문자 'MC'표기보다 소문자 'emcee'의 영문표기를 선호하신다고 하네요. 그런 철학이 있기에, 저도 엠씨세이모의 랩이 참 듣기 편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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