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박은주

[컨슈머와이드-박은주] "오늘도... 도시락?"
마음이 따뜻한 부장님은 점심시간에 홀로 회사 사무실에 남는 나를 안타깝게 쳐다봤다.
 "뭐라도 사줄까?"
 "아뇨. 저 도시락 싸왔어요. 감사합니다."
채밍아웃*한 지 벌써 1달째, 아무래도 돌연 채식주의자가 된 나의 존재가 배려심 많은 우리 동료들을 계속 불편하게 만드는 듯했다. 1시간 후 점심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부장님이 편의점에서 산 오렌지주스를 건넸다.
 "이거라도 먹으라고."
(*채밍아웃이란? 채식'과 정체성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뜻의 '커밍아웃(coming out)'의 합성어. 본인이 채식주의자임을 밝힘을 뜻한다 /출처 : 네이버 오픈사전)

 지금도 그렇지만 12년 전에는 채식이라는 개념이 거의 등장하지 않았던 때였다. 정 많은 회사 사람들은 통통한 내가 채식을 하고 영양실조라도 와서 굶어 죽을까 봐 걱정하기 시작했다.
화장실에 숨을까, 복도에 숨을까... 점심시간만 눈에 띄지 않으면 나는 다시 '채식주의자'가 아닌 '일반 동료'로 분류될 것이다.
다음날부터 나는 동료들이 식당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함께 타고 1층에서 헤어졌다.
"햇빛이 좋아서 어디 공원에라도 가서 도시락 먹으려고요."
날이 맑아서 공원에 간다고 둘러댔지만,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추운 날은 어디로 가야 하나. 종로 5가에서 혜화동까지 1시간 동안 걸으며 앞날을 걱정하던 차, 나에게는 빛바랜 창문 스티커가 눈에 띄었다.

피. 아. 노. 학. 원.

동네 피아노 학원  (사진 제공 : 박은주 DALL-E 주문제작)

나는 피아노와 공식적으로 절교한 사이였다. 할리우드급 쿨한 사상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헤어진 연인과는 친구도 될 수 없듯이, 나에게 피아노도 그랬다. 중학교 배정을 받고 난 후 모든 것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전공할 거 아니면 이제 혼자 쳐도 되지 않니?라는 엄마의 말로 6년간 다니던 피아노학원을 끊었고, 1달도 채 지나지 않아, 학교 갔다 집에 와보니 6년간 치던 어쿠스틱 피아노도 없어져 버렸다. 나는 울지 않았지만, 그 후로 피아노학원이 있던 상가 2층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나뿐만 아니었다. 중학생이 되면서 피아노와 갑자기 이별하게 된 친구들끼리는 이런 얘기가 돌았다. "한 달 동안 안 치면 아예 손이 굳어버린대." 나는 그 얘기를 철썩 같이 믿었고, 내 손은 피아노를 칠 수 없는 '굳은 손' 저주가 걸리게 되었다.

그런데 직장인이 돼서 피아노라니... 그러나 나는 점심시간을 보낼 아지트가 필요했고,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나는 초등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피아노학원에 그날 등록했다.

낮은 음자리표의 '도'도 못 찾는 나에게 선생님이 건넨 건 피아노소곡집. 어느 유럽 공원의 사진이 떡하니 표지를 차지하고 있는 게 초등학교 1학년 때 연습하던 그 책이었다. 플로피디스크가 USB로 진화하고, 우표로 펜팔 하던 게 SNS로 바뀌는 사이, 피아노학원만은 냉동상태 그대로였다. 나무판넬로 가벽을 만들어 0.5평씩 나뉜 방에 피아노가 한 대씩 차 있었고, 초등학생들은 진도표에 사과를 색칠하고 있었고, 하농이며, 바이엘이며, 체르니며, 소나타며... 정규 교재들도 그대로였다. 심지어 매일 가는데도 수강료를 초등학생과 차등을 두지 않고 10만 원만 달라고 했다. (수강료에 대한 덧붙임말 : 성인 전용 피아노학원은 보통 월 20만원입니다. 제가 다녔던 학원은 동네 피아노학원입니다.)

피아노소곡집1 (출처 : 세광아트)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싸들고 개인공간이 없다시피 하는 사무실에서 벗어나, 0.5평 피아노로 꽉 찬 방에 들어앉으면, 중학생 때 '굳은 손' 저주가 걸렸던 손은 마법에서 벗어나 다시 제 기능을 하기 시작했고, 손이 움직이면서 나의 뇌 속 어느 창고에 처박혀있던 음악지식들이 점차 부활하기 시작했다. 저주에서 풀린 나의 손은 '나비야'만 쳐도 행복해했다. 어릴 때는 선생님이 '여기서 여기까지 10번 치면 불러'라고 하면 집에 얼른 가려고 순식간에 피아노를 치느라, 곡을 제대로 느껴본 적이 없었다. 피아노와 이별했던 지난 날들, 우여곡절을 겪고 성장한 나의 감성들이 간단한 곡만 쳐도 마구마구 깨어나기 시작했다. 외국민요 클레멘타인을 치게 된 어느 날에는 노래에 감동해서 연습실에서 혼자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름다움으로 꽉 찬 나의 피아노 연습시간, 초등학생들이 가끔 문을 열고 "어, 나 이거 쳤던 건데." 하면서 잘난 척 해도, 레슨을 받고 있노라면 "선생님 저 사과 다 칠했어요. 이제 뭐해요?"라면서 문을 벌컥 열어도 나는 행복하기만 했다.

 "소피아님(나의 채식카페 닉네임), 혹시 30만 원만 좀 빌려줄 수 있어요? 월세 낼 돈이 뚝 떨어졌네. 아르바이트비가 곧 입금되거든요. 3일 후에 갚을게."
근근이 알바를 이어가며 환경운동을 하던 지인이 급하게 연락이 왔다. 당시 나는 회사를 다니면서, 환경운동을 하는 시민활동가들에게 부채감이 있었다. 얼마나 궁하면 30만 원도 없을까. 돈을 안 갚게 할 방도를 생각하다가, 그 사람이 드러머라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30만 원 갚지 말고, 그 돈으로 우리 남편 드럼 레슨 해주세요."
내가 존경하는 인품을 가진 남편은 호탕하게 그 레슨에 동의해 줬고, 그렇게 남편도 드러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드럼연습실 (사진 제공 : 박은주 DALL-E 주문제작)

어느덧, 내가 피아노를 다시 친지 6년, 남편이 드럼의 세계로 진입한 지 3년이 되었다. 둘만 살아 휑하던 우리 집의 거실에는 전자피아노와 전자드럼이 나란히 놓였다. 퇴근 후 소음방지매트 위에서, 각자 헤드폰을 끼고 각자의 악기를 연습하고 있노라면, 행복이 따로 없었다. 다른 취미가 없었던 우리는 음악이 유일한 취미가 되었고, 어느새 웬만한 대중음악은 연주할 수 있는 레벨에 진입했다. 끌어당김의 법칙은 참으로 놀랍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는 건 사실이었다. 동아제약 국토대장정 밴드 세션을 모집한다는 글에 나는 응했고, 남편과 나는 각각 드러머와 키보디스트로 다른 세션들과 함께 2000명 앞에서 무대에 설 수 있었다. 가수 클론과 밴드 장미여관 대기실의 바로 옆 대기실을 쓰게 된 우리 아마추어 세션들은 무대에 올라가기 전 느끼고 있었다. 우리가 지금 생애 빛나는 한 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국토대장정 공연 (사진제공 : 박은주 - 출처 옆유풍)

악보도 없이 무대에 오른 남편은 그날 파란 조명 아래서, 리듬을 온몸으로 느끼며 힘차게 드럼스틱을 휘둘렀다. 사원-주임-부장-임원이 유일한 루트인 회사에서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던 남편은 그 무대에서만큼, 밴드 전체의 박자를 좌우하는 드러머였다. 육아로 드럼을 치지 못한 지 어언 6년 남편은 종종 그때 무대 동영상을 보고 또 본다.

고장 난 LP판처럼 8090 발라드만 듣던 남편은 드럼을 알게 된 후 음악취향도 완전히 바뀌었다. 드럼 비트가 돋보이는 락이며 대중음악이며, 좋은 노래가 있다면 나에게 소개도 해준다. 남편은 음악을 그냥 듣지 않는다. 마치 자기가 연주하듯, 드럼 비트를 느끼며 손과 발, 머리를 흔들며 듣는다. 아이의 탄생과 함께 남편은 드럼을 접었었지만, 아빠의 영혼을 받은 아이가 드럼을 배우기 시작하며 다시 드럼의 세계로 진입하고 있다.

드럼치는 필자의 아들 (사진 제공 : 박은주)

성인의 악기 연주... 다들 꿈은 꾸지만, 쉽게 시도해보지 못한다. 손도, 머리도 굳어서 쉽지 않을 것이라고, 배워서 써먹을 데가 없을 것이라고, 운동할 시간도 없는데 악기연주할 시간은 더 없다고... 자꾸만 뒤로 주춤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 어른이 되면서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고, 그렇기에 음악을 온몸으로 느낄 감성 하나는 전공자 못지않다. 작고 단순한 선율에도 감동할 수 있는 영혼이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음악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지 아무도 모른다. 어른이 되었다고 모든 가능성을 잘라버리지 말자. 지금이야말로 바로 악기를 배우기 딱 적합한 시간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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