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박은주

[컨슈머와이드-박은주]  "이번 여름에 2박 3일 짧게 여행 가자. 어디 가고 싶은데 없어?"
"음... 글쎄?"
짧은 여름휴가를 계획하며 들뜬 남편 앞에서 나는 눈을 껌뻑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고 싶은 곳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여행이라... 포유류의 범위 안에선 종을 막론하고 평생 동안 뛸 수 있는 심박수가 정해져 있다고 하던데, 내 여행심박수는 모두 고갈되어 버린 것일까.

우리는 차가 없는 뚜벅이 가족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여행은 고속버스터미널이나 기차역에서 시작해야 한다. 대중교통으로 접근이 가능한 지역을 몇 개 추리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블로그 검색이다. '6세 OO(지역명)'로 이미 어린이를 동반하고 그 지역에 다녀온 인생 선배님들의 친절한 경험담을 반복 학습한다. 아름답고 역사적으로 뜻깊은 곳이어도 그 곳이 아이의 흥미를 끌 수 있는 곳인지 생각하며 선택지를 좁혀간다. 물론 대다수의 육아여행선배님들은 자차가 있으므로,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은 극히 드물다. '역시 지방은 자차 없이는 힘들어' 탄식을 내뱉은 후, '지하철과 버스가 잘 되어 있는 지방 대도시를 갈까? 아냐, 그럴 바에 서울에 있는 게 좋겠다'는 자조가 반복되면 다시 여행지는 미궁으로 빠진다. 밤마다 토론한 지 1주일째, 뚜벅이의 접근성, 지역의 관광인프라, 아이가 즐길만한 체험들이 많은 여행지는 여수로 당첨되었다.

여수 밤바다 (사진: 박은주) 

하필이면 우기였다. 떠나는 날 아침부터 재해경고문자로 핸드폰이 윙윙 울렸다. SRT와 KTX는 우기는 걱정 말라는 듯 안개를 뚫고 순식간에 여수로 우리를 데려다주었다. 기차역에서 걸어서 15분 걸리는 고급호텔 로비에는 이미 체크인을 기다리는 가족여행객들로 꽉 차 있었다. 걷기를 했나, 뛰기를 했나, 기차 타고 이동만 했을 뿐인데 벌써부터 피로감이 엄습한다. 콩나물시루 같은 호텔 로비에서 버티기를 20 여분, 간신히 체크인을 하고 안락한 침대에 몸을 누이니 침대와 물아일체가 되고 싶다.
"아빠. 우리 이제 뭐해요?"
케이블카와 유람선, 실내수영장이 있다는 소문을 입수한 6세가 침대에서 눈 좀 붙이려고 하는 부모에게 말을 건다. 6세의 설레는 목소리를 듣자니 피곤한 몸이 자동으로 일으켜진다. 아.. 그리운 유치원이여, 가족여행만 왔다 하면 개인시간이라고는 1분도 주어지지 않는 여행이 벌써부터 버거운 나는, 행복에 겨워서 그런다고 스스로를 다독여본다.

이튿날 새벽, 침대에서 눈이 떠진 나는 무엇에 이끌린 듯 벌떡 일어났다. 어제 호텔 수영장 온수풀에서 진탕 놀았기 때문일까. 옆 침대에 누운 남편과 아이가 깊은 잠 속에 기척이 없다. "운동 갔다 올게."라고 하고는 호텔을 나서는데 시계를 보니 새벽 6시다. 낯선 여수에서 나에게 새벽에 외출할 용기를 준 것은 여수시의 공용자전거 '여수랑'. 외지인이어도 간단한 가입만 하면 단돈 천 원으로 하루종일 무제한으로 자전거를 빌릴 수 있다. 서울 따릉이와 달리 헬멧도 제공되고, 앱 작동도 쉽다.
여수랑을 이끌고 맨 처음 향한 곳은 오동도. 뜨거운 여름, 어린이와 여행 시 힘들 것으로 강력 추정되는 여행지라 이번 일정에 없던 곳이다. 공용자전거가 아니었다면 꿈도 못 꿔볼 오동도에 스스로의 동력으로 왔다는 것에 새벽부터 감개가 무량하다. 새벽 6시에 오동도에 온 건 나뿐만이 아니다. 이렇게 꾸물꾸물한 새벽에 조깅을 하겠다고 지역주민 몇 명이 운동복을 입고 빠르게 걷고 있다.

오동도에서 (사진 :박은주)

오동도도 다 봤는데 아직 아침 7시, 남편과 만나기로 한 호텔 조식시간까지는 아직 2시간이 더 남았다. 터널을 지나 순식간에 포차거리를 지나 좀 더 달리니, 지역주민들이 바글바글한 곳이 나타났다. 자전거를 세우고 지도를 체크하니 이 곳은 여수라면 꼭 와보고 싶었던 서시장! 이 곳도 뜨거운 여름, 어린이와 여행 시 힘들 것으로 추정되는 여행지라 배제되었던 그곳이다. 와, 정말 꿈만 같다. 자전거가 아니었다면 와볼 수도 없었을 텐데... 서시장에서 혼자 감탄하며 행복해하고 있자니, 파지 복숭아 열개를 바구니 한가득 담아 오 천 원에 파는 과일가게가 눈에 띈다. 파지 천도복숭아도 열개에 오천 원이란다. 주원이가 복숭아를 참 잘 먹는데... 과일 1 봉지는 여수랑 앞주머니에 놓고, 다른 한 주머니는 핸들에 걸치고 가니 자전거가 한층 무겁다.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와 자전거를 세우고 호텔에 도착해서 띵동 벨을 누르니, "아주 이번 여행은 복숭아를 질리도록 먹겠구먼."하고 남편이 내 손에 들린 검은 봉지를 받아준다.

여수 자전거 여수랑을 타다 (사진 : 박은주)

문득 작년 여름 3개월 간 갔다 온 중앙아시아 여행을 떠올렸다. 아이와 친정엄마가 모두 잠든 밤, 어두운 방안 침대에서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 시간이 가장 행복했던 그때, 어쩌면 나는 작게나마 개인시간을 갈구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왜 가족여행을 매번 버거워할까 고민을 하던 어느 날, 곽민지 작가의 '걸어서 환장 속으로'를 읽게 되었다. 패키지여행 말고 자유여행을 갈구하는 부모님을 모시고 떠난 스페인, 많이 준비했기에 순조로울 거라는 기대를 깨고 아버지는 여권을 분실하고, 어머니는 지난날을 떠올리며 울고, 랜선으로 여행에 참여하는 친언니는 잔소리 카톡을 보낸다. 보여드리고 싶은 것도 많고, 해드리고 싶은 것도 많았던 우리 가이드 곽민지 작가는 결국 지쳐서 엉엉 울게 되는데...  아, 나만이 가족여행을 버거워한 것이 아니었구나.

책 '걸어서 환장 속으로'의 홍보 카드뉴스 (출처 : YES24 발췌)

세대를 아우르는 가족여행,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지 않으면 다양한 욕구가 충돌할 수밖에 없는 24시간 합숙에서 새벽에 가진 90분의 개인시간은 나의 배터리를 충전시켰다. 혼자 있을 수 있는 짧은 찰나 만으로도 하루종일 함께 할 수 있는 동력을 얻을 수 있을 수 있음을 기억하며 여수 가족여행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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