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슈머와이드-박은주] "처음 전화 걸어 이런 얘기해서 미안한데..."
점심시간이 지나고 사무실 책상에 앉으니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들려오는 음성은 여자였는데, 여자는 나를 알고 있는 듯했다. 아무리 들어도 아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나도 방금 경찰서에서 전화받았어. 너도 정신없겠지만, 너밖에는 전해줄 곳이 없어서... 옆에서 잘 신경 써줘."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전화 온 그 여자는 언니의 고등학교 동기였다. 방금 언니가 자살시도를 했다 실패했다고 한다. 자살시도 실패라... 언니가 자살에 실패해서 다행이다라는 안도감이 스쳐 지나간 곳에는 어마어마한 배신감이 나를 압도했다. 아무리 사랑했다고 쳐도, 세상을 떠난 남자친구보다 가족과 함께 보낸 절대시간이 10배는 더 많은데, 어떻게 그렇게 이기적일 수 있나. 오후 2시였다. 전화를 끊고 사무실에서 노트북으로 업무를 보는데, 마음이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그게 화인지, 놀라움인지, 두려움인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더 이상 내가 정상적인 표정과 말투로 언니를 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방금 들은 사실을 부모님에게 전할 수는 없었다. 연애도, 이별도 많이 해보지 못한 사회초년생, 이렇게 어린 내가 언니의 슬픔을 보듬을 수 있을까. 퇴근길 은행 ATM에 들러 통장잔고를 찍어보았다.

집은 평온했다. 언니는 늘 그렇듯 집에 들어와 있지 않았고, 엄마는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엄마, 혹시 언니 데리고 유럽여행 갈래? 패키지 알아보니까 300만 원 정도 하더라. 언니 몫은 내가 낼께."
그렇게 엄마와 언니는 2주일 만에 여태껏 팔자에 없던 유럽패키지여행에 나섰다. 애인과의 사별로 압도당하고 있는 언니에게 다른 세상도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게 가장 큰 목표였지만, 어쩌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언니의 슬픔을 아웃소싱 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최소한 유럽 가는 비행기에서는, 단체 버스에서는, 유럽의 2인실 숙소에서는 자살시도를 할 수 없을 것이므로...
몇 년이 흘러 슬픔을 이겨낸 언니는 말했다. 그 여행은 최악이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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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별한 사람 곁에 우리는 어떻게 머물러야 할까. 돌이켜보면 언니의 슬픔 앞에서 우리 가족 모두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시무룩한 딸을 이끌고 유럽여행을 하면서 휴게소에 들르면, 엄마는 영어 한마디 못하면서도 "오렌지 직접 간 거 신선해 보인다. 하나씩 먹자."라며 용기 내서 오렌지주스를 2잔 사와 건네면서도, 호텔방에 돌아온 언니가 자신의 슬픔을 말하려 하자, "가이드가 내일 몇 시 기상이라고 했니?"라며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유럽여행 후 언니가 여전히 미소 없이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언니가 자살시도를 또 할까 봐 무서워하면서도, 우울증 증상 중 하나였던 언니의 무례한 말투에 눈 맞춤을 피했다. 유럽여행 동안 딸이 기분을 환기할 수 있도록, 언니 방의 모든 가구를 180도 돌려놓는 대공사를 했던 아빠는, 유럽여행에서 돌아온 언니가 남자친구의 영혼을 추모하겠다며 자신의 방에서 향을 피웠을 때 너무나도 당황해서 집에서 함부로 향 피우지 마라 호통을 쳤다. 모두가 언니를 걱정했지만, 아무도 직접 언니가 괜찮은지 묻지 않았다. 언니가 결국 스스로 살아내서 참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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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이 흐른 뒤 우리 가족은 얼마나 진화했을까? 외삼촌의 장례식을 치른 외숙모가 우리 가족을 보러 오겠다고 했다. 아픈 사람의 마음은 그 아픔을 겪어 본 사람이 가장 잘 안다고, 애인과의 사별을 경험해 본 언니가 장례식 내내 함께 했기에 외숙모의 고마움이 더 컸다.
"엄마, 이번에 외숙모 오시면 어디로 갈 거야?"
"더운데 계곡 만한 곳이 없지. 텐트 치고 수박 먹자."
오빠를 잃은 엄마가, 남편을 잃은 외숙모를 위로하는 곳으로 택한 곳은 남한산성 계곡이었다. 무료주차장에 차를 대고, 국립공원 화장실 옆 갓길로 걸어 철재 계단으로 내려가면, 언제 무너져도 의아하지 않은 망가진 콘크리트 계단으로 이어진다. 표지판 하나 없는 이름 없는 계곡을 다들 어떻게 아는지, 동네 주민으로 보이는 가족들이 삼삼오오 텐트와 캠핑의자를 놓고 과자를 까먹고, 아이들은 물도 거의 말라버린 듯 졸졸졸 흐르는 계곡에서 얼마 안 되는 물에 발을 적시고 논다. 나무그늘 아래 돗자리를 펴고 누워있으면, 곰개미군단이 돗자리로 올라와 인간들이 흘려놓은 음식들을 거침없이 탐하고, 굶주린 흰줄숲모기들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살에 달려든다. 정돈된 캠핑사이트면 모를까. 부모님이 준비하신 밥, 수박, 텐트, 캠핑의자를 들고 위태위태한 콘크리트계단을 몇 차례나 오고 갈 참이면, 이게 생고생이지 휴양은 아니라는 강력한 예감이 드는 그런 곳이다.

집에서 싸온 밥을 다 먹고 나자 10킬로짜리 수박이 등장했다. 저 큰 수박을 어떻게 다 해치우나. 그러게. 어제 내가 먹을 만큼만 반찬통에 수박 잘라간다니깐, 엄마는 고집스럽게 수박은 현장에서 잘라먹어야 제맛이라고 했다. 수박 자르기 전에 외숙모가 딸에게 보낸다며 인증숏을 찍어달라고 하셨다. 여러 차례의 인증숏 후 엄마가 본격적으로 수박에 칼을 대기 시작했다. 쩍 하고 갈라지는데 선홍빛 빨간 속살이 신선한 향을 풍겼다. 개미가 개에 버금가는 엄청난 후각을 지녔다는데, 수박이 수박향 방귀라도 뀌었는지 테이블로 개미들이 슬금슬금 올라오기 시작했다. 수박을 먹으면 손이 얼마나 끈적거릴 텐데 걱정하는 나와 달리, 엄마는 수박을 잘라다가 외숙모에게 건넸다.
"아이고, 수박 먹은 지 정말 오래됐지 뭐야. 병원에서 오빠(외삼촌)가 식사도 잘 못하고.."
수박에도 어김없이 외삼촌이 소환되었다. 수박으로 배를 채운 어린이와 어른들이 물놀이를 하러 가니, 텐트에는 외숙모와 엄마만 남았다.
"그때 검사했을 때 의사가... " 외숙모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1시, 2시, 3시, 4시... 아이가 돗자리로 돌아와 잠을 잤다가 깼다가 화장실을 갔다가 다시 물놀이 가는 4시간 동안 엄마와 외숙모는 텐트에 나란히 누워 끝없이 수다를 떨었다. 수다를 떨었다는 표현은 어쩌면 부적절할지 모른다.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간단한 질문을 던져 호응을 했고, 외숙모는 끝없이 이야기했다. 화장실 다녀온 아빠가 캠핑의자에 앉자 청자가 한 명 더 늘었다. 물놀이하다 고개를 돌려 돗자리 구역을 돌아보면, 엄마와 아빠는 끝없이 끄덕이고 있고, 외숙모는 끝없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10시에 만나 5시에 외숙모를 지하철역에 내려다 드리는데, 외숙모가 벙긋 웃었다.
"덕분에 계곡도 가보고 너무 행복했어. 고마워. 다음에 또 만나."
책 [애도수업] 등의 저자 윤득형 박사가 제시한 유족 위로하기는 3단계로 나뉜다. 첫 번째는 물리적으로 함께 있어주기, 그다음 단계는 상대방이 감정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열린 질문하기, 마지막이 들어주기이다. 동조하거나 울어줄 필요도 없이 그저 끄덕끄덕 경청을 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남한산성에 갔지만 계곡물에 발 한번 안 담그고, 텐트와 돗자리에서 4시간을 꼬박 이야기를 듣는 외숙모 옆 엄마를 보며 생각했다. 10여 년 전, 한 달 동안 소식도 없다가 어느 날 초췌한 몸으로 언니가 집에 돌아왔을 때, 그리고 묻지도 않았는데 남자친구의 장례를 치르고 왔노라고 고백했을 때, 그때 언니에게 말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줬더라면, 그랬냐고 호응을 했더라면, 다음 날이고 또 그다음 날이고 언니에게 밥 먹자고 테이블에 앉히고 또 끄덕거렸더라면, 언니가 회복하는 기간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10킬로짜리 수박을 자르며, 보온병에 타온 아이스커피를 따르며 애도의 대화는 그렇게 쉬이 이어질 수 있는 건데 그때는 참 서툴렀다.
일 때문에 남한산성 계곡에 오지 못한 언니가 퇴근 후 전화했다. 외숙모 잘 놀다 가셨냐고 묻기에 내가 말했다.
"어쩜, 외숙모 그렇게 끝없이 말씀하시지. 장장 4시간을... 놀랐어."
그러자 언니가 말했다.
"잘했네. 이제 좀 안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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