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주 작가

[컨슈머와이드-박은주] "선생님 저기 소파에 편하게 앉으시고요. 검사는 3분 후에 진행할게요. 호흡 편히 하시고요."
갈색의 포근한 소파에 앉아 등을 눕히고 팔을 놓으니, 잠시 후 간호사가 커다란 집게를 몸 여기저기에 부착했다. 암막커튼이 쳐졌고, 가습기에서 솔솔 수증기가 올라왔다.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다. 이 검사야말로 정말 껌이지. 온몸에 힘을 풀고, 소파에 머리를 뉘이고, 팔을 더 편히 놓고 호흡을 길게 길게...
"검사 끝났습니다."
눈을 감고 호흡에 집중하려고 시도할 때쯤 검사가 끝났다. 일주일 후 이메일로 받아본 자율신경균형검사의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스트레스 저항도, 스트레스 지수, 피로도 모두 "매우 나쁨"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소파는 편했고, 나는 온몸을 늘어뜨렸는데, 그깟 기계가 나의 자율신경균형을 '고위험군'으로 평가했기 때문이다.
슬쩍 남편의 검사결과를 보니 남편의 자율신경은 그야말로 정상이었다. 상사와의 갈등으로 입안이 헐었던 건 남편인데, 이런 망할 기계가 다 있나. 검사실에 들어간 내가 너무 긴장했을 확률, 검사 전날 금식하느라고 잠을 못 잤을 확률을 모두 따져보더라도, 나의 자율신경균형은 적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럴 리 없어. 기계가 이상한 거야. 부정해 보았지만, 사실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헐떡거리고 있다는 것을.

건강검진실에서 (사진 제공 : 박은주, OpenArt AI 주문제작) 

내가 그렇게 스트레스받고 있다고? 검사결과를 떠올리며 슈퍼에서 물건을 고르고 있던 어느 주말 한낮, 핸드폰이 울렸다.
'02-3670-****'
심장이 쿵쿵 울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일까. 02-3670으로 시작하는 모든 번호는 회사였다. 나는 시스템 담당자로써 임직원들이 쓰는 시스템을 유지보수하는 업무를 맡고 있었다. 나는 때로 내가 의사 같다고 생각했다. 의사에게 찾아오는 모든 환자들은 문제를 안고 오듯이, 나에게 걸려오는 모든 전화는 좋은 소식이 없었다. 특히 주말은 더했다. 시스템이 안 돼요. 급한데 어떻게 하죠? 왜 로그인이 안 되죠. 문제의 원인은 다양했다. 정말 시스템 문제일 수도 있고, 엑셀 문제일 수도, 컴퓨터 문제일 수도, 고객의 오타 문제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고객은 지금 주말에 근무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화가 오지 않으면 메신저가 수시로 켜졌다. 퇴근 후 '부재중' 표시를 등록해 놓아도, '부재중이신데 혹시...'라고 메시지가 종종 떴다. 컴퓨터는 꺼졌지만, 나의 뇌는 로그오프에 실패했다. 연락이 오지 않을 때면, 곧 연락이 올 거야라고 두근거렸고, 연락이 오면 무슨 문제일까 하고 두근거렸다. 회사생각 하지 말아야지 라며, 소파 옆 바스켓에 휴대폰을 놓아두던 건강검진 때도 내 무의식은 혹시 올 수 있는 연락으로 두근거렸는지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깜짝 선물을 했다. 회사행사에서 스마트워치를 경품으로 받아온 것이다. 남편은 이미 스마트워치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그 기능을 궁금해하던 차에 반가운 선물이었다.
"핸드폰 하고 연동됐으니 재미로 확인해 봐."
나의 모든 행동과, 위치와, 기분까지도 체크해 준다는 스마트워치, 그동안 주관적으로 평가했던 나의 모든 것들이 정확한 데이터로 기록되기 시작했다. 그깟 시계가 뭐라고, 나를 따라다니는 평가자가 생기니 나는 급격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마 만보쯤은 걸을 거야 대략 생각했던 나의 출퇴근시간 총 소요걸음이 4천 보도 안 된다는 걸 알게 되니 점심시간 걷는 시간을 더 할당하게 되었다. 인바디몸무게보다 정확도가 많이 떨어졌지만 체지방과 근육량을 수시로 평가할 수 있게 되니, 먹는 것에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퇴근 후 먹는 간식이 과일일지라도, 이것이 나의 몸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평가하게 되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수면점수였다. 어느 날 남편의 권유로 측정한 나의 수면 점수는 40점을 밑돌았다. 출산 후 아이 때문에 깨는 경우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나는 숙면을 하지 못했다. 그건 몇 년 전 유럽고객을 담당했을 때, 퇴근 후에도 유럽 고객들이 남긴 메시지 알림이 수시로 뜨면서 생긴 불안 때문이었다. 직무가 바뀐 후 나는 드디어 타임존이 다른 고객과 멀어졌지만, 나의 새 고객이었던 한국고객들도 야근하는 일은 잦았고 그것이 설령 밤 10시여도, 새벽 1시여도 나는 휴대폰 알림을 쉬이 무시하지 못했다.

스마트워치 (사진 제공 : 박은주, 출처 OpenArtAI 주문제작)

수면점수에 반성하던 어느 날 우연히 핸드폰에서 나의 스트레스지수를 시간별로 보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노란색과 빨간색 막대기로 가득 차있었다. 나의 시간대별 스트레스 지수는 나의 행동과 확실히 일치했다. 출근하고 나면 이미 쌓여있는 메일을 읽고, 메신저에 답을 해주기 시작했는데 그때 나의 스트레스지수는 빨간색 막대기를 확확 찍었다. 그 후 급한 건들이 어느 정도 해결되고 나면 다시 노란색막대기, 점심시간에는 초록색 막대기가 드디어 등장했다. 점심시간 이후 회의라도 했다 치면 다시 노란색막대기가 다시 출현하더니, 빨간색이 되었다가 다시 사그라들었다. 가장 문제였던 건 퇴근을 할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오후 5시쯤 급하게 연락을 받았을 때였다. 급한 연락 앞에서 나의 스트레스 지수는 빨간색을 다시 기록했다. 아이를 봐주시는 친정엄마에게 사정을 얘기해서 늦는다고 하기, 배고프지만 참기, 남편에게 전화해서 급한 일이 생겼다는 걸 말하기 등 예상하지 못한 일정을 1차 수습하고 난 후, 기다리고 있을 고객에게 전화해 "걱정마세요."라고 세상 쿨하고 친절한 목소리로 안심시켰다. 고객은 상냥한 나의 대응에 진심으로 고마워했고, 나도 고객을 도울 수 있음에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내 스트레스 막대기는 거짓말 하지 못했다.
"마음을 편안히 하세요. 호흡을 해보세요."
 스트레스막대기가 빨간색으로 물들던 날은 업무를 잠시 멈추고 9번의 호흡을 시도했다. 띵~하면 숨을 들이켜고, 띵~하면 숨을 후 하고 내뱉고, 그렇게 9번 반복하겠습니다. 들이마셨다... 내뱉었다...아무리 호흡을 해도, 나의 무의식은 계속 울리는 메신저를 놓을 수 없었나보다. '아직 스트레스 지수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호흡에 집중하세요'라고 스마트워치가 말할 때쯤 나는 그 순간을 못 참고 눈을 떴고, 짐작대로 내 메신저에는 고객의 메시지가 와있었다. 호흡할 시간이 없다 일단 이거부터 해결하자. 그렇게 나는 자율신경 고위험군의 삶을 살고 있었다.

퇴사 전 스트레스 지수 (사진 제공 : 박은주)

퇴사한 지 1년째, 나의 영혼은 온전히 회사생활을 잊었다. 남편이 나에게 그리 강조했던 '멍 때리기'가 정말 쉽게 된다. 지난날 회사생활할때  자려고 불을 끄면, 오늘 못했던 회사 숙제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가, 다시 불을 켜고 다이어리에 내일 해야 할 목록을 쓰기를 반복했었다. 다시 잠을 청해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기도 했다. 그때는 그 멍때리기가 어떻게 하는건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요즘에는 자율신경계도 회사생활 루틴을 완전히 잊었는지 스마트워치 스트레스지수는 온통 초록색이다. 바쁜 아침시간 뜸들이던 아이가 바닥에 물을 흥건히 쏟아도, 노란색과 빨간색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때 내가 고위험군이라고 평가해 줬던 스마트워치의 지난 데이터들을 보면서 생각해 본다. 과연 그때 나는 주말과 밤에도 수시로 울리던 핸드폰의 메신저와 전화와 문자와 이메일 앞에서, 호흡만으로 초록색 막대기를 유지하기 힘들었을까. 정말 퇴사만이 답이었을까. 호랑이 굴에 갇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는 데, 나의 내공은 부족했던 것일까. 만약 나의 친구가, 나의 아들이, 나의 남편이 동일한 상황이라면, 나는 그들에게 뭐라고 말했을까. 명상해 보라고, 호흡해 보라고 조언하기보다는, 그냥 당신을 로그오프 시키지 못하는 그 호랑이굴에서 당장 나오라고 했을 것이다. 누군가 당신의 빰을 수시로 후려치는 데 '명상과 호흡'만으로 아프지 않다면 그게 더 비정상 아닌가.

퇴사 후 스트레스 지수 (사진 제공 : 박은주)

물론 수시로 알람이 울리는 그 일에서 살아남은 동료도 있었다. 그녀의 메신저에는 '문의는 메신저로 받지 않습니다.'라고 적혀있었고, 전화가 오면 고객의 하소연을 들어주기보다는 자르기 바빴고, 업무시간 외에는 전화알림이 떠도 웬만하면 받지 않았다. (그런 그녀도 야근과 주말근무를 종종 했다.) 그녀는 시도 때도 없이 문의하는 고객에게 싹수가 없었지만, 그녀 자신에게는 싸가지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아니므로, 나는 고객이 곤란해하면 얼마나 곤란할까 공감하는 성격이었으므로, 그저 그 일은 나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고 평가해 본다.

퇴사 후 1년, 나는 이제 스마트워치와 연동된 핸드폰이 추천해 준 명상앱으로 잠자기 전 알아차림 명상을 한다. 아무런 알람도 뜨지 않는 나의 고요한 핸드폰은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면 된다고 알려준다. 발부터 머리까지 나의 이완된 신체를 느끼는 바디스캔명상을 하다가, 오늘의 순간에 감사하다 보면 어느새 스르륵 깊은 잠에 들어있다. 꿈도 꾸지 않았던 지난밤이 가고 날이 밝으면 어떠한 알림도 없이 아침 정확한 시간에 개운하게 눈을 뜬다. 시계를 만지막거리며 몇신지 체크하는 순간, 스마트워치와 연동된 앱이 나의 수면을 평가하고 '오늘도 목표수면시간에 도달하였습니다.'라고 칭찬해 준다. 지난날 나는 얼마나 회사의 평가에 민감했던가. 회사의 이익이 아닌 내 이익만 바라보는 스마트워치라는 평가자를 손목에 달고서, 나는 나 자신에게 싸가지 있는 하루를 만들어간다.

명상하는여자 (사진 제작 : 박은주,  OpenArt AI주문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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