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박은주

[컨슈머와이드-박은주]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요. 부디, 잘 가시오.'
동영상 속에는 빨간 꽃모자를 쓴 배우 김태리가 사랑하는 이의 따뜻한 손을 애써 놓으며 떠나가고 있었다. 남겨진 이병헌의 눈에 눈물이 고이자, 화면 밖 남편의 눈도 덩달아 충혈되었다.
 "세상에, 또 봐? 같은 드라마를... 지겹지 않아요?"
같은 드라마를 보고 또 보는 남편을 놀려도, 이미극에 몰입한 남편은 미동도 없다. 20대 대학생은 40대 아저씨가 되었지만 드라마 보는 습관은 변하지 않았다. 20대 때는 한번 작품에 빠지면 운동할 때도 공부할 때도 자취방에서 같은 드라마를 몇 백번 돌려봤다던 그는, OTT로 만나 반해버린 작품도 같은 예의로 대했다. 대체 무슨 장면이기에 저렇게 몰입하나 하고 옆에 앉아보는데, 에잉? 뭔가 이상하다. 떠나가는 김태리가 속보로 걷고 있었다.
 "지독하다. 이렇게 슬픈 장면도 1.5배로 보는 거야?"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장면 중 하나 (사진 제공 :박은주 /출처 : 미스터 션샤인 유튜브 캡처)

결혼 후 TV 없이 산 10년, 언니가 넷플릭스 가족관람권을 매달 공유한 후 우리 가족은 모두 OTT에 빠져들었다. 출퇴근하는 기차에 올라타서 10분, 회사버스를 기다리며 10분, 기차역에서 집까지 걸어오는 인도에서 7분 등 남편은 자신의 생활 안에서 짬짬이 OTT 볼 시간을 확보했다. 회사와 아이에게 할당하고 남은 자투리시간을 모두 긁어모아도, 1시간도 채 안 되는 시간. 날씨도 확인해야 하고, 짬짬이 업무 외 시간에도 수시로 울리는 회사 메신저를 확인하고 나면 OTT 볼 시간이 하루 30분도 채 남지 않는다. 세련되고 화려한 비디오가 수천 개인데,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OTT궁지에 몰린 남편은 배속기능을 누르기 시작했다. 처음은 1.25배로 시작했다. 너무 빠르지 않을까 우려도 되었지만, 1.25배는 금방 적응되었다. 가끔 처갓집에 놀러 가 지상파 방송을 보고 있노라면, 1배속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모두 느림보로 보였고, 지상파에는 적용되지 않는 OTT배속 기능이 그리워 손이 근질거렸다.

배속기능은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축구 예능을 볼 때 빛을 발휘했다. 현실세계에서는 '슛 골인!'이라는 MC의 멘트와 함께 지나갈 1초도 안 되는 순간을, 지상파 예능프로그램은 물고 늘어지기 때문이다. '슛~'과 '골인!'사이, 골인이 되었을지 궁금해하는 시청자들에게 방송국은 쉽게 그 결과를 알려주지 않는다. MC중계석, 공차는 정면샷, 공차는 후방샷, 공차는 전체샷, 감독과 응원석의 표정, 상대편의 표정, 다시 아까 봤던 공차는 장면을 모두 보고 난 후에야 '골인'이 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OTT로 봐서 이 정도지, 실제 TV방영을 보면, '슛'과 '골인'사이 중간광고까지 나오고, 중간광고 이후에는 아까 보던 마지막 장면이 또 나오니 환장할 노릇이다. 처갓집에 가서 TV로 축구예능을 보던 남편은, 중간광고를 결국 견디지 못하고 채널을 돌려버렸다. 다음날 축구예능 최신 편이 OTT로 넘어오자 남편은 다시 1.5배속과 10초 점프버튼을 가동했다.

1개의 골을 보려면 9개의 장면들을 견뎌야 한다 (사진 제공 :박은주 / 출처 : 유튜브 뭉쳐야찬다 캡처)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책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을 보면 배속 시청하는 냉정한 시청자는 비단 남편뿐이 아닌 듯하다. TV의 멀뚱한 리모컨에 비해 핸드폰 OTT의 약삭빠른 리모컨을 손에 쥐게 된 시청자는 모든 기능을 이용해, 한정된 시간 안에 더 많은 동영상을 흡수한다. 1.5배까지 허용된 배속으로 이해가 되는 한 빠르게 프레임을 넘기고, 불필요한 스토리는 10초 건너뛰기로 넘어간다. 때로는 드라마 몇 회를 통째로 건너뛰기한다.
그러나 아무리 건너뛰기와 배속시청기능을 이용하더라도, 스토리에는 인내심이 필요한 법이다. 거대한 그림을 그리기 전, 새로운 인물과 배경을 설명하는 도입부를 견뎌야 대단원까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영화처럼 2시간 이상의 몰입을 요구하는 영상물의 경우, 영화관처럼 옴짝달싹 할 수 없는 곳에서야 어쩔 수 없이 집중을 하지, 바로 영화를 꺼버릴 수 있는 핸드폰 앞에서는 새로운 스토리를 받아들일지 말지 적극적으로 고민한다. 스토리를 감상하기보다는 그저 알고 싶은 시청자들은, 영상과 호흡하기를 포기하고 영화 15분 요약 유튜브를 찾아본다.  이런 냉정한 시청자들에게 혹시 영상제작자들은 무척 서운하지 않을까.

책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표지 (사진 제공 :박은주 /출처 : YES24)

"어쩔 수 없지. 나도 그러는데."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를 편집했던 영상편집기사인 친언니에게 물어보니, 언니도 시청자일 때는 냉정하다고 한다. 머리가 복잡할 때는 집중해야 하는 영화 대신 '허허'거릴 수 있는 예능프로그램을 보고, 재미가 없는 영상물은 초반 몇 분만 견디고 바로 꺼버리며, 그저 알고만 싶은 영상물은 블로그나 유튜브에서 정리된 내용을 살펴본다.
 "요즘 시청자들은 시간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가성비 있는 영상을 만드는 게 더 중요해진 거지."
영상편집의 트렌드를 파악하는 게 직업상 매우 중요한 언니는 현재 OTT를 5개나 동시에 구독하고 있다. 구독하는 OTT 외에도 유튜브숏폼이나 웹드라마도 본다. 바빠서 엉덩이 붙일 시간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요즘 시청자들을 어떡하든 붙잡아 앉힌 영상을 보고, 그 특징을 파악한다.
배속재생을 MZ세대의 특징으로 써놓은 기사들이 많다. MZ세대가 주요 OTT시청자들이라는 점에서, 배속재생을 MZ세대의 특징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세대를 막론하고 OTT앞에서는 누구나 가성비를 따질 것이다.

배속시청은 MZ세대의 특징이라는 기사들 (사진 제공 :박은주/ 출처 : 구글 뉴스화면 캡처)

OTT의 배속재생으로 볼 수 있는 가장 큰 변화는 바로 권력의 이동이다. 몇 개 지상파가 일방적으로 송출하는 영상만 시청할 수 있었던 때에는 방송국에 권력이 있었지만, 다채로운 영상플랫폼과 다기능의 리모컨이 허용된 요즘에서야 드디어 시청자에게도 권력이 생긴 것이다. 이제 TV앞에서 불평하며 질질 끌려가는 수동적인 시청자가 아니다. 중간광고도, 드라마 늘리기도, 반복되는 장면도 버튼 한 번이면 건너뛸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모두가 드라마 모래시계를 볼 수밖에 없었던 시절에는 정부가 지상파 저녁뉴스만 통제해도 여론을 조작하기가 참 쉬웠지만, 요즘 시청자들은 TV앞에 아예 없다.

뉴스면 뉴스, 드라마면 드라마 하던 시대는 끝났다. 넷플릭스만 하더라도 7만 6,897개에 달하는 마이크로장르(micro-genre)가 존재한다. 시청자들이 자신이 원하는 가성비를 찾아 바쁘게 토끼처럼 뛰어다니는 시대, 광고주 눈치 보면서 방송국 편성에만 목말라하던 작품들이 시대와 장르를 넘어서 시청자들에게 다가올 기회를 얻었다. 가성비를 최상의 가치에 두는 시청자들 때문에, 가치만 맞다면 개봉관을 못 찾아 묻힐 수밖에 없던 독립영화부터 과거 주목받지 못한 다양한 작품들까지 제작시기와 키워드 상관없이 다시 조명받을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지상파의 편성권력과 영화관의 상영차별 앞에서 조용히 사라졌던 작품들이 쉴 새 없이 토끼뜀 하고 있는 시청자들 앞에서 부활하길 기대하며, 오늘도 OTT의 리모컨을 쥐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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