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주 작가

[컨슈머와이드-박은주]  "들어가실까요?"
선선해지려는 여름밤,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고 강남역 인근 비스트로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멀끔한 비즈니스 캐주얼을 입은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메신저로 서로 얼굴을 사진으로 본 터라 간단한 목례만 하고 식당으로 들어섰다. 이렇게 아름다운 레스토랑에 와본 적이 있었던가. 높은 천장에 달려있는 노란 조명들이 화사했고, 빨간 벽돌이 감성을 더했다.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고급레스토랑을 두루 살폈다. 갈색빛 나무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하얗고 커다란 파스타그릇에 바질이 뿌려진 토마토파스타가 나왔다. 올리브향이 솔솔 나는 게 참 맛있었다.
'여기 맛도 좋고 분위기도 너무 좋다. 다음에 선배랑 와봐야지.'
무심결에 든 생각에 순간 놀랐다. 남자친구와는 이미 헤어진 지 오래였고, 그날 나는 소개팅 중이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예의 발랐고, 업종도 나와 비슷한 IT계열이라 말도 잘 통했다. 소개팅이 의례 그렇듯, 비스트로를 나와 커피를 마시고 헤어졌다.

강남역의 어느 비스트로 (사진 제공 : 박은주 / Dall-e 주문제작)

그날 남자와 헤어지고, 강남역에서 2호선을 기다리는데, 발이 너무 아파왔다. 평소 절대 신지 않던 하이힐이 발뒤꿈치를 할퀴어, 이미 살이 벌겋게 까인 상태였다. 막 승강장으로 들어오는 지하철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문이 열리자 강남역으로 데이트를 시작하는 커플들이 줄지어 지하철에서 나왔다. 강남역은 생소하고, 소개팅이라고 나갔더니 헤어진 남자친구나 생각하고, 뒷꿈치는 욱신거리고, 피곤하고... 도대체 난 오늘 뭘 한 걸까?

빨간 하이힐을 신고 지하철 플랫폼에서  (사진 제공 : 박은주 /Dall-e주문제작)

"띠링띠링"
하이힐을 구겨 신고, 만석인 지하철 타기를 주저하고 있을 때, 전화기에 그의 번호가 떴다. 승강장에서 "여보세요."하고 전화를 받는데, 한쪽 눈에서 또르르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만났고 결혼했다. '선배랑 꼭 가야지'하며 찜해두었던 그 강남역 비스트로는 가지 않았다. 우리는 예전에 하던 대로 떡볶이나 먹고, 동네공원 산책이나 하느라 강남역까지 갈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명이 참으로 몽환적이고 따뜻했던 그 비스트로처럼, 스쳐 지나간 사람들이랑은 해보았지만, 정작 남편이랑은 해보지 못한 게 의외로 많았다. 그중 하나가 스티커 사진 찍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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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월드 복구해 봤어? 진짜 대박이야. 옛날 사진이 그대로 있네!"
20대 시절을 통째로 함께한 친구가 싸이월드를 복구해, 어릴 때 찍었던 사진들을 캡처해서 보내주었다. 비밀번호조차 생각나지 않는 싸이월드를 여러 차례의 인증을 걸쳐 복구해 보니, 지난날 내가 잊고 지내던 내 과거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들어가 있었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중국에서 함께 연수했던 친구들과, 그룹 입사동기들과 찍은 스티커사진들에는 까불까불한 우리들이 담겨있었다. 입을 벌려 크게 웃거나, 꼬불꼬불한 피에로 가발을 쓰거나, 우스꽝스러운 플라스틱 안경을 쓰고 있었다. 너무 오래돼서, 어떤 맥락에서 찍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수많은 스티커 사진 어디에도 당시 남자친구이던 남편이 없었다. 역시 우리는 떡볶이나 먹고, 동네 산책 하느라고 스티커사진 찍을 기회도 없었던 것이다.

 싸이월드 미니홈피 (사진 제공: 박은주 /출처 : 뉴스원)

유행은 돌고 돈다지만, 20년 전 유행이었던 스티커사진이 다시 돌아올 줄 상상도 못 했다. 20대 청춘들이 드나드는 곳곳마다 스티커사진샵이 들어서고 있다. 토끼귀, 마녀모자, 파란 가발, 플라스틱 선글라스와 머리띠까지 소품도 현대 트렌드에 맞게 업그레이드되었다. 친구끼리, 연인끼리 소품을 골라 거울에 비추어보고, 사진 찍을 콘셉트도 통일해 본다. 이미 스티커사진을 찍기 전, 거울 앞에서 포즈를 연습하고 SNS용 단체셀카도 찍어본다. 즉석사진샵에 들어선 순간, 사진 찍기 위한 놀이가 시작된 것이다.

스티커사진기 앞에 서서 옵션을 고르는 순간 단 몇십 초 만의 시간이 주어지기 때문에, 사전연습은 필수다. 그렇기 때문에 인터넷에 '스티커사진 포즈추천'을 치면 인원수에 따라 추천 포즈가 포스팅되어 있기도 하다. 요즘 MZ세대에서 유행이라는 MBTI에 걸맞은 포즈콘셉트도 찾을 수 있다. 대담한 ENTJ끼리 찍는 과감한 포즈부터 내향적인 ISFP끼리 속닥대는 포즈까지... 필름카메라 시대를 넘어서 핸드폰 카메라로 무한정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시대, 스티커사진기의 제한적 조건이 오히려 사진 찍는 우리를 대담하고 치열하게 만든다.

 
MBTI별 스티커사진 포즈 관련 콘텐츠 (사진 제공 : 박은주 /출처 : 인생네컷) 

연차를 낸 남편과 시내에 나갔다가 산책 겸 들른 숙대입구, 나란히 걷던 남편이 나를 스티커사진샵으로 이끌었다.

"엥? 사진 찍으려고? 저거 비싸. 오천 원은 할걸?"  
"저번에 말했잖아. 나랑도 찍어보고 싶다고."
지난번 내가 싸이월드의 스티커사진을 보다가, 남편과 찍은 스티커사진이 없기에 무심코 한 말을 남편은 흘려듣지 않았다. 그때 내가 스티커사진 어쩌고 할 때는 소파에 누워 별 반응도 없던 사람이 사실은 내 말을 마음속에 필기해 놨다니. 남편은 알까? 내가 순간 심쿵했다는 것을. 아이를 유치원 보내며 바쁜 아침을 보낸 후 정신없이 나오느라, 머리 몰골도 장난 아니고, 비비크림도 바르지도 못했고, 목이 조금 늘어난 티셔츠도 대충 걸쳐 입고 나왔는데, 사진기계 앞에 서려니 썩 내키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살아보니 순간을 놓치면 다시 오지 않는 기회도 있더라.

후줄근한 우리 둘은 스티커샵으로 들어가 소품들 앞에 섰다. 스티커사진샵에 들어왔지만, 유치뽕짝 소품들 앞에서 남편은 어쩔 줄 몰라 소품을 바라보며 한참을 연구하다, 벽에 MZ세대들이 붙여놓은 스티커사진 선배들의 작품을 유심히 관찰했다. 소품 앞에서 멍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소품과 거울을 여러 번 오간 끝에 머리띠와 모자 하나씩 골라 스티커사진을 찍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몇십 초 동안 우리는 20대로 돌아갔고, 우스꽝스러웠다가, 로맨틱했다가, 윙크했다가, 손으로 브이를 하기도 했다. 몇십 초의 시간이 끝나자 연극이 끝난 듯, 아까 과감했던 것에 내심 민망해했다.

MBTI별 스티커사진 포즈 관련 콘텐츠 (사진 제공 : 박은주 /출처 : 인생네컷)<br>
스티커사진 소품들  (사진 제공 : 박은주 Dall-e 주문제작)

"드르륵, 드르르륵"
5분 후 인쇄된 네 컷 스티커사진이 2장 인쇄되어 나왔다. 아이를 낳고, 우리 둘이 사진 찍은 지 몇 년만인가. 내 핸드폰 속에는 온통 아이사진, 혹은 아이와 남편사진뿐이다. 우리는 과거에 연인이었지만, 이제는 연인이기보다는 아이의 엄마와 아빠로 서로를 바라본다. 물론 연인이었을 때도 다른 커플에 비하면 참 못 해본 게 많다. 떡볶이와 동네산책만으로도 충분했던 우리의 데이트, 정작 당대 유행했던 것들은 친구들과 다 해본 지난날 나의 사진들을 보면서 생각해 본다. 영원히 함께 할 것이기에 굳이 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로 수많은 유치뽕짝들에 당신을 배제해서 미안했다고, 그리고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면 당신과의 유치뽕짝을 놓치지 않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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