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박은주 

[컨슈머와이드-박은주] "방금 봤어? 여기 채식식당도 아닌데 가게 아저씨가 '쑤스(素食:채식)'를 알아들었어!!!"
저녁 8시 호텔 앞 거리는 한산했다. 5박 6일의 짧은 일정, 오로지 먹기 위해 떠난 여행이었다. 대부분 대만 채식식당은 영업 마감을 했고, 야시장을 가자니 첫날부터 부담스러웠다. 동네 사람들 두세 명이 간이나무의자에 둘러앉아 국수를 먹고 있는 노포가 아니었다면, 번화가를 한참 벗어난 호텔 옆 골목은  편의점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어 보였다.
"채식(素食), 그것도 비건채식(全素)을 아신다는 거죠?"
노포 아저씨는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비건으로 먹을 수 있는 만두와 국수를 내놓았다. 단돈 100 대만달러(한화 약 4300원)에 채식 전병과 국수를 먹을 수 있다니... 흥분한 나와는 달리, 마주 앉은 남편은 야외테이블에 앉아 연신 손부채를 가동했다. 대만은 4월부터 슬슬 덥다는데, 연중 가장 덥다는 7월 중순이었다.

대만길거리음식_첫날 노포에서 먹었던 국수와 전병 (사진:박은주 제공) <br>
대만길거리음식_첫날 노포에서 먹었던 국수와 전병 (사진:박은주 제공) 

서울에서 야채김밥 한 줄 먹을 때마다 얼마나 분투했던가. "제가 채식하고 있어서, 야채김밥 한 줄에 동물성 재료는 다 빼주세요."라고 요청하면 게맛살은요? 계란은요? 그럼 햄도 안 먹어요? 그럼 맛없을 텐데...라는 수많은 질문에 직면해야 했다. 기나긴 문답 끝에 만들어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허기가 몰려왔던 어느 날 종로 어느 오래된 김밥집에서는 재료들이 모두 빠진 김밥은 싸줄 수 없다고 얄짤없이 보이콧당했다. 분식집에서만 어려운 건 아니었다. 직장 회식으로 갔던 고급 삼겹살집에서, 계란은 빼주세요라는 내 요청에 끄덕끄덕하던 종업원이 십 여분 후 들고 온 건 반숙된 계란이 터져 나물과 섞여버린 돌솥비빔밥이었다. 종업원이 계란을 빼달라는 오더를 넣었지만, 손이 빨라야 하는 주방에서는 모든 재료를 순차적으로 넣을 수 밖에 없었다. 채식이라는 개념이 보편적이지 않은 세상에서 살다가, 허름하기 그지없는 대만 노포의 무표정한 주인아저씨가 "췐쑤(全素 :비건)"을 알아듣는 순간, 꿈이라도 꾸는 듯했다. 정말 대만은 채식의 성지였어!

다음날 아침, 호텔 조식으로 비건채식 단일메뉴가 나왔다. 빵쪼가리에 구운 야채였지만, 채식 전문식당도 아니면서 저가호텔 조식으로 구운 야채에 식물성 소스까지 섬세하게 배려받으니 감개가 무량했다. 아침을 먹고 나오니 8시였다. 스멀스멀, 아니 노골적인 더위가 아침부터 몰려오기 시작했다. 관광지에는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다. 호텔에서 에어컨이나 잔뜩 쐬다가, 한 달 전부터 찜해놓은 대만 채식식당으로 향했다. 저녁도, 그다음 날 점심도, 저녁도... 가오슝은 대만 제2의 도시라는데, 채식식당은 서울의 10배, 아니 20배는 더 많아 보였다. 소리소문 없이 생겼다 사라지는 서울의 채식식당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대만의 채식식당은 기반이 굳건해 보였고, 손님도 많았다.  

호텔에서 제공해준 비건 조식 (사진:박은주 제공)  

와! 와! 와! 를 연발하며, 음식에 카메라를 들이대었던 2박 3일이 지나고, 우리에겐 아직 3일이 더 남아있었다. 3일째 아침, 호텔 침대에서 눈을 뜬 나는 더 이상 당일에 방문할 채식식당을 검색하지 않았다. 가고 싶은 곳도, 먹고 싶은 것도 사라졌다. 이것은 분명 더 이상 채식전문식당에 가고 싶지 않다는 강렬한 마음이었다. 영화 <봄날은 간다>의 유지태가 이영애에게 던진 대사가 떠올랐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그 후 3일간 우리는 그냥 깨끗해 보이는 아무 음식점이나 들어가, 이것 빼고 저것 빼고 요리를 주문해서 먹었다. 배가 고프면 편의점에서 군고구마나 좀 사 먹고, 과일가게에서 과일과 오이를 사서 먹었다.


가치소비를 중요시하는 MZ세대의 활약으로, 우리가 대만에 갔었던 7년 전에 비하면 채식불모지에 가까웠던 한국도 참 많이 변했다. 인터넷 쇼핑으로만 구할 수 있었던 비건만두는 이제 대형마트는 물론이고 편의점까지 깔렸다. 비건 라면도, 비건 스테이크도, 비건 밀크도, 비건 과자도 생각만 하면 살 수 있는 그런 시대가 되었다. 일반음식점에서 채식으로 주문하는 건 여전히 어렵고, 비건 식당은 여전히 생겼다 사라지고, 그 개수도 현저히 적지만, 그래도 이 정도만 해도 과거보다는 채식하기가 그나마 수월해졌다. 소비자들이 변하니 식품가공회사들도 발 빠르게 움직였다. 생산해 봤자 수요가 많지 않으니 생산에 주저했던 중소회사들도 트렌드에 발맞추어 한 두 제품씩 수줍게 출시한다.

채식인구가 1%도 안 된다는 걸 어림짐작으로 알고 있는 채식인들은 새 제품이 출시될 때마다 식품회사의 변화에 고맙고도, 불안하다. 가뜩이나 외식을 잘하지 않는 채식인들이 열심히 사줘 봤자, 식품회사에 이익을 줄 정도로 소비할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지랑이처럼 피었다 사라진 수많은 채식제품과 채식식당의 전처를 밟을 터였다. 그런데 이번만은 달랐다. 채식과 전혀 상관없는 유튜버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작은 곰젤리 몇 천 개를 녹여서 초대형 젤리 만들기에 도전한 유튜버도, 식용곤충요리를 시연한 셰프유튜버도, 치즈 100장을 컵라면에 녹이면 어떻게 되는지 실험한 유튜버도 채식제품 리뷰에 뛰어들었다. 비건혐오가 넘쳐나는 시대에, 식품회사들이 비건이라는 키워드로 출시한 일련의 제품들은 충분히 대중의 이목을 끌 수 있는 '괴식(怪食, 괴상한 음식 또는 괴상한 식사법)'이었기 때문이다. 버섯고기 이건 다를까? 콩으로 고기를 만들어? 생전처음 먹어보는 콩고기 시식회 등 자극적인 썸네일이 따라붙었다. "자 이제 한번 먹어보겠습니다."라는 멘트 이후 비건제품 쪼가리를 젓가락으로 들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 이거 무슨 맛이야!" 멘트가 나오는 순간, 방송을 보는 네티즌들은 재미있는 실험을 지켜보듯 "ㅋㅋㅋㅋ"를 남발하고, "이런 괴식을 좋아하는 비건, 외계인 아님?"이라는 조롱을 덧붙였다. 시식보다 실험에, 미식보다는 괴식에 가까운 이 묘사와 네티즌들의 반응에 채식인들은 어땠을까?

콩고기시식회 (사진: 박은주 제공/유튜브 갈무리)

'식물성 음식에 대해 자주 리뷰해 주시고 객관적으로 평가하려 노력해 주셔서 감사해요. 이렇게 구독자 수가 많은 유튜버가 식물성 제품을 미디어에 노출시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인식 개선에 도움이 되니까요..!' , '다양한 비건제품들 리뷰해 주시는 거 너무 유익해요!!' , '와 비건 제품 리뷰 오랜만이라 반갑다 ㅋㅋㅋㅋ'

무플이 악플보다 무섭다는 걸 알기 때문일까? 유튜버들이 미간을 찌푸리든 말든, 채식인들은 수많은 팔로워들에게 채식제품이 노출되었다는 것만으로 황송하고 고마워했다.

비건 만두, 비건 스테이크, 비건 소시지, 비건 핫바에 이어, 최근 국내 굴지의 참치회사에는 대형마트의 섹션을 통째로 빌려 식물성 참치를 내놓았다. 채식이라는 것을 부각하기 위해 포장지도 초록으로 물들였고, 참치처럼 요리할 수 있는 그럴싸한 조리예도 떡하니 제시했다. 먹기 전에 충분히 맛이 예상이 되지만, 출시해 준 게 고마워서 집에 사 왔다. 색은 참치와 비슷했으나, 질감도 맛도 두류가공품 특유의 그 맛이었다. 회사 관계자는 정말 이걸 맛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출시했을까? 사람들은 또 얼마나 이 가공품을 사볼까? 지금은 호기롭게 한 섹션을 차지하여 출시하였지만, 언제 또 소리소문 없이 사라질까? 한입 먹었을 뿐이데, 수많은 질문들이 들이닥친다. 차마 아이와 남편에게는 이대로는 권하지 못하겠고, 주말에 김밥 말 때 조금씩 넣어 처치했다. 없어지기 전에, 유튜버들이 괴식이라고 또 이 제품을 테이스팅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스친다.

참치없는참치캔 (사진:박은주 제공/ 동원F&B 광고 갈무리)

"아무래도 안 되겠어. 이제는 그냥 식당에 가자."
대만 3일째 아침날 채식전문식당 포기선언을 하자, 남편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마파두부를 시켜도, 햄버거를 시켜도, 토마토파스타를 시켜도, 거기에는 콩고기가 올려져 있었다. 콩고기, 아니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글루텐과 분리대두단백의 조화. 인공조미향에 질린 건지, 콩고기의 식감에 질린 건지, 아님 미각이 더 예민해져서 안 나던 비린맛을 느낀 건지 알 수 없었다. 고수의 이파리 하나 들어가도 인상을 찌푸리듯이, 온몸이 콩고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렇게 대만 채식미식여행은 막을 내렸고, 그 후로 나의 입에서 채식 먹으러 대만 가자는 말은 쏙 들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대만 채식시장을 응원한다. 하루가 다르게 비건가공품을 발전시키는 대만이 한편으로 참으로 고맙고, 채식인들의 시장이 굳건해서 뭉클하고, 일부 품목이 전 세계로 수출되어서 기쁘다. 한국의 식품회사들이 줄줄이 내놓는 비건가공품에도 대만산'두류가공품'이 많이 들어간다.

채식을 한지 올해로 벌써 12년째, 내 미각은 현미, 고구마나 오이같은 단순한 식재료를 좋아하게 발전해서, 더이상 가공품을 원하지 않게 되었지만, 새 제품이 출시되면 내 지갑은 여지 없이 열린다. 비건제품이 적은 수요임에도 대만처럼 안착될 만큼 성장하길 응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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