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주 작가

[컨슈머와이드-박은주] "쌘님(선생님), 내가 링크 보내줄 테니까 시간 될 때 한번 읽어볼래요."
"쌘님, 신청했습니꺼? 신청기간 얼마 안 남았던데, 사람들이 아직 많이 신청 안 했네."
"쌘님, 이 분들 참 아름답다. 봉화에서 농사지으시는 분들인데, 삶 자체가 아름다워요. 쌘님도 아마 차차 알게 될 거예요."
울산사시는 지인 L선생님은 집요했다. 안부전화인 줄 알았더니, 아름다운 농부단체가 있다고 대뜸 꾸러미를 구독하란다. "참 아름답다."는게 유일한 설명이었다. 설명이 어찌나 간단한지, 10년 전 한참 화제가 되었던 광고문구 "남자한테 참 좋은데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네."가 떠올랐다.

당시 나는 대기업 회사원이었다. 서울 번쩍번쩍한 고층건물에서 하루종일 노트북 들여다보고 앉아있으면, 매달 고액 월급이 따박따박 꽂혔다. 대학 졸업 때 통장에 찍힌 몇 천만 원의 학자금 빚의 기억 때문일까. 돈에 치인 경험은 강렬했고, 한번 잡은 기득권은 절대 놓을 수 없었다. 비록 그 회사가 내가 지향하게 된 가치의 대척점에 있을지라도 말이다. 가치와 현실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나는 역으로 돈을 썼다. 원자력발전이 주력사업 중 하나인 그룹사에 근무하면서 탈원전을 주창하는 정당에 후원했고, 회사 산우회 총무로써 회원들이 먹을 족발과 수육을 사면서, 개인적으로는 채식단체에 후원했다.

고층빌딩에서 일하는 여자  (사진 : DALL-E 박은주 주문제작)

다른 대기업에 다니는 남편도 어쩌면 나와 닮은꼴이었다. 회사에 다니는 걸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그 회사에서 산재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기사를 써주고, 여전히 그 비리를 캐는데 주력하는 시사잡지사에 후원했다. 맥주 한 캔 하는 날이면 남편은 김남주의 시 '어떤 관료'를 핸드폰으로 찾아 낭독하고는 말이 없었다.

"관료에게는 주인이 따로 없다!
봉급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다!
(... 중략...)
일제 말기에 그는 면서기로 채용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근면했기 때문이다
(... 중략...)"

언젠가부터 나는 내 삶에 흘러들어온 것들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4월 어느 날, 커다란 상자가 문 앞에 도착했다. 아이를 돌봐주던 친정엄마가 상자 가득 담겨있는 채소뭉태기를 발견하고는 직장에 있는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 많은걸 너 또 어쩌려고 그래. 요리도 안 하면서."
"내가 다 먹을게. 그대로 놔두세요. 자자, 신경도 쓰지 마세요."
그날 밤 아기와 남편이 잠든 안방의 문을 닫고 조용히 나와, 나는 홀로 부엌에서 저녁 10시까지 나물을 씻고, 데치고, 양념했다.

별농의 4월 꾸러미에는 봄나물이 많다  (사진 : 별농 제공)

다음 해 3월, 별난농부들(이하 '별농')에서 새 시즌을 알리는 문자메시지를 받고서야, 나는 여전히 별농이 어떤 단체인지 전혀 모르고 있다는 걸 인지했다. 1년에 9번이나 꾸러미를 받아보았지만 그뿐이었다. 재갱신할지 말지 판단하기 위해, 가입 1년 만에 별농 다음카페에 들어가 봤다. 마음을 먹고 찬찬히 카페를 들여다보니, 내가 구독했던 꾸러미 외에도, 별농에서는 다양한 사업들이 동시에 진행 중이었다.

별농의 사업들은 소비자가 획기적으로 불편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첫 번째로 살펴본 '주문재배'는 1년 동안 먹고 싶은 작물들의 양을 가늠하여 주문하면, 해당 농산물이 완료되는 시점에 발송해 주는 사업이었다. 각각의 농산물 앞에 '당신이 1년 동안 먹고 싶은'을 붙이자, 이렇게 생소할 수 없었다. 1년 동안 몇 개의 옥수수를 먹을 건지, 몇 킬로의 팥을 먹을 건지... 긴 호흡의 먹거리를 고민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두 번째로 들여다본 '농사펀드'개념은 더 생소했다. 1구좌당 1만 원으로 판매하며, 감자와 약호박 모두 1구좌당 5킬로 정도 수확할 것을 예상한다는 것이다. 다만 그 해의 날씨와 천재지변을 고려하면 최종 수확량은 변동이 있다는 것, 수확된 작물이 콩알만 하거나 흠집이 있어도 공평하게 분배된다는 것, 감자의 경우 수확시점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이 일반 구매와 달랐다. 즉, 금융펀드도 투자자가 손실의 위험을 감수하는 것처럼, 농산물의 생사고락을 투자자가 함께 하는 것이다.

별농의 감자밭에서 농사펀드참여자가 감자를 캐고 있다 (사진 : 별농 제공)

세 번째로 '나의 작은 텃밭'은 1구좌 5만 원이며, 구좌당 5평의 텃밭에 원하는 작물을 심어달라고 농부에게 주문할 수 있는 사업이다. 다만, 수확은 참여자가 직접 해야 한다고 한다. 작물은 고라니와 멧돼지가 먹을 수도 있다는 주의사항도 적혀있다. 참고로 이 텃밭은 서울에서 아주 먼 '봉화'에 있다. 세 번째 사업은 너무나도 획기적인 나머지, 별농 역사상 그 누구도 하겠다고 손 들어준 회원이 없었다.

사업들의 참신함이 언뜻 보면 대학생 벤처창업동아리의 작품 같기도 했다. 농부들끼리 모여 토론한 흔적들이 역력했고, 열정적이었지만, 그만큼 생소하고 불편했다. 사업에 참여하겠다는 회원은 물론 매우 적었다. 여태껏 그럴싸한 반항도 못하고 그놈의 돈 때문에 공감도 안 되는 회사에 영혼 없이 다니는 내 처지를 생각하니, 봉화 농부들의 이 대책 없고 굳건한 패기를 밀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별농 회원 2년 차, 꾸러미 재갱신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들어간 다음 카페에서 나는 꾸러미 외에도 이 세 가지 사업에 참여해 보겠다고 손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반항이었다.

별난 농부들과 친환경 플래카드  (사진 : 별농 제공)

"시스템이 무슨 엑셀인 줄 아나, 한 달 안에 무조건 해달래. 주문하면 다 되는 줄 아냐고."
진상으로 유명한 고객과 회의를 마친 동료가 눈이 벌게 가지고 책상에 앉으면서 투덜거렸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그룹사의 IT를 총괄하는 조직이었다.
'위에서 오더(Order)가 갑자기 떨어진 거라, 어쩔 수 없었어요. 시스템 저한테 설명해 주셔도, 저는 정말 모르거든요. 어쨌든 해주세요. 부탁드려요'라는 멘트를 또 했음이 분명했다. 왜 깨달음은 난데없는 장소와 시간에서 오는가. 터무니없는 주문을 해대기로 유명한 그 진상고객을 떠올리니, 문득 별농이 생각났다. 혹시 별농의 사업들도 도시민들의 터무니없는 주문을 타파하려고 시도한 걸까?

세상은 참으로 편리해졌다. 사람들이 신선식품을 찾는 욕망에는 춘하추동이 없어졌고, 마트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과일과 채소를 구해낸다. 신선한 채소를 언제든 먹을 수 있으니, 과거 저장식품이었던 김치와 시래기는 기호식품에 가까워졌다.

나는 밥상 욕구의 진화로 농촌에서 벌어지는 일을 조금은 알고 있다. 농부들이 세상에 팔리는 작물만 대량 재배해야 돈이 되기 때문에, 돈이 크게 되지 않는 종자는 없어지고 있다. 사람들이 선호하는 작물을 재배하는 농부들도 괴롭기는 마찬가지다.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단호박품종의 90% 이상은 일본에서 수입된 종자로 매년 일본 종자 구입에 많은 돈을 써야 한다. 여름에나 재배되는 채소와 과일들을 겨울에 재배하느라 비닐하우스는 난방비로 고통받는다. 스마트팜이 점차 채소시장을 잠식함에 따라, 신념을 가지고 땅심 받는 노지 재배하던 농부들은 점차 입지를 빼앗긴다. 농촌은 이렇게 절망적인데, 정작 채소와 과일을 주문하는 도시민들은 농촌에 거의 관심이 없다. 공감은 없고 주문만 해댈 뿐이다.

개발자들이 진상고객을 만나면 흔히 하는 말이 있다. "Garbage in, garbage out(쓰레기가 들어가면 쓰레기가 나온다)", 즉 고객의 주문에 논리가 없으면, 시스템도 그 요구사항에 맞추느라고 엉망이 된다는 말이다. 영혼이 없는 시스템도 아프다 못해 고장이 나는데, 밥상의 터무니없는 요구사항을 맞추느라고 우리 농부들은 얼마나 아파하고 있을까.

"춘하추동은 모르겠고, 농촌도 모르겠고, 다만 우리에게 사시사철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주세요."
그런 터무니없는 주문이 팽배한 세상에서도 봉화의 별난 농부들은 도시민들에게 따뜻한 손을 내민다. 잉여농산물이 없도록 1년 먹을 작물들을 미리 주문해 보면 어떻겠냐고, 농산물의 수확에 참여하는 기쁨을 느껴보며 농산물을 이해해 보라며, 몇 주간 내린 기록적인 폭우로 성장이 더딘 작물의 사정에 귀 기울여달라고... 모든 것은 함께 할 때 행복한 것이라고... 그것이 그들이 꾸러미의 이름을 상희(相喜, 서로 행복한, 즉 도시민과 농민이 모두 행복한)의 꾸러미라고 지은 까닭이리라.


세상의 속도에 잠식당할 것 같은 순간들이 오면 나는 종종 별농 다음카페에 들어가 본다. 별농에 게시된 글 중 벌레를 피하는 법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부추 : 소중한 사람에게도 나누지 않는다는 첫물은 벌레에게 내어 주어요. 기온이 올라가면서 어느 순간 벌레들의 활동은 보이지 않고 이후에는 넉넉히 거두어 먹을 수 있어요.'

세상 사람들이 돈 버는 방법을 궁리할 때, 별농은 벌레와도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봉화의 별난농부들의 실험은 계속되고 있다. 참 돈도 안 되는 일에 몰두한다 싶지만, 그들은 이미 돈으로 따질 수 없는 무형의 소중한 가치들에 눈을 떴다. 공동노동하기 위해 만나면, 제철이 선사하는 가장 신선한 채소로 진수성찬을 만들어 하하호호 밥상을 나누고, 만나기만 하면 새로운 아이디어로 입이 쉴 새가 없다. 별난 농부들은 지난해 '동반식물로 가꾸는 텃밭/정원 안내서'라는 책도 공동출간했다. (동반식물은 함께 자라면 더 잘 자라는 식물의 조합이다. )

책 동반식물로 가꾸는 텃밭정원 안내서 (사진 : 책표지 갈무리)

행복하려고 이 땅에 태어난 것이라면, 별농은 이미 그 목적을 달성했다. 벌레와 공존할 수 있어서, 동반작물을 발견해서, 새로운 종자를 심어볼 수 있어서, 회원들과 감자를 나눌 수 있어서... 봉화 별농에는 행복해야 할 이유가 넘쳐흐른다. 세상이 정해놓은 대로 '어떤 관료'로 이 삶을 사는 게 무슨 재미냐며 별농은 그렇게 웃으며 손을 내민다.

그나저나, 올해도 덕분에 잘 먹겠습니다. 별농의 거의, 도꾸리, 들풀, 따꺼, 말랭늘보, 물총새, 바비캔, 바우, 백퍼, 불량감자, 죠이팜, 차차, 탄이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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