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박은주

[컨슈머와이드-박은주 "중앙아시아는 채식주의자에게 어려운 곳이다. (...) 고기를 피하고 싶다면 시장에 가서 채소를 구하라. (...) 식당에 채식음식을 주문해도, 거기에는 고기가 들어가 있을 수 있다."
여행안내서 론리플래닛 중앙아시아 편을 쓴 사람은 채식주의자였을까. 한국에서는 절판된 '론리플래닛 중앙아시아' 영문 PDF를 꾸역꾸역 읽다 보니 책 말미에 비건을 위한 무시무시한 경고가 적혀 있다. 비단 론리플래닛뿐만 아니다. 인터넷에 넘치는 비건여행자들의 중앙아시아의 영문 여행 후기를 보니, 호러급 여행기가 넘친다.
"트레킹여행 할 때 8박 9일 동안 그 '논'이라는 딱딱한 빵조각을 씹고 또 씹었어요."
"토마토오이샐러드는 비건이다. 하지만 그 외에는....."
"'고기 없이'는 투르크멘어로 etsiz, 키르기스어와 카자크어로는 atsiz, 우즈베크어로는 gushtsiz, 러시아어로는 без мяса에요. 하하. 여러분의 행운을 빕니다."

아... 네엡. 서양채식주의자들의 중앙아시아 여행기를 읽을 때마다 삐삐삐 위험신호가 들렸다. 그럴 리가. 설마. 그곳도 사람 사는 곳인데 야채가 주인공인 음식이 그렇게나 없을까. 된장국 하나만 시켜도 시금치나물이 자동으로 나오는 식당이 익숙한 탓에, 중앙아시아에서 비건으로 겪어야 할 미래의 고초를 부정하고만 싶었다.
그 후로 나의 관심은 오직 중앙아시아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집중되었다. 나의 첫 목적지는 키르기스스탄, 그곳이 나온 모든 지상파 여행다큐를 보다 보니 나오는 음식들은 샤슬릭, 베쉬바르막, 라그만, 삼사... 이름만 다양했지 죄다 고기와 밀가루요리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핸드폰 속 여행다큐 화면을 멈췄다.   
"찾았다!"
여행다큐 속 키르기스스탄의 깊은 산골에 위치한 산장, 중학생도 채 안 되어 보이는 산장지기 딸이 두 손 가득 내온 그 빨간 수프! 아무리 줌인해 보아도 야채 위주로 보이는 그것! 침대에 누워있던 나는 몸을 바로 세우고 화면 속 글씨를 그대로 노트에 적었다. 'Борщ(발음: 보르쉬)'

세계테마기행 중 키르기스스탄 산장의 보르쉬 ((사진 제공 : 박은주 /출처 : 유튜브 캡처)

보르쉬는 비트수프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폴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아제르바이잔 등 동유럽뿐만 아니라, 구소련이었던 중앙아시아에서도 사랑받고 있다. 한국 지상파에서도 외국 음식을 다루는 콘텐츠에서 몇 번 소개된 적이 있었는데, 일부 방송에서는 보르쉬를 두고 한국의 김치찌개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수프라고 했다. 시원하고 담백한 것이 실제로 김치찌개와 유사한 맛이 나서, 한국음식이 당길 때 그나마 위로가 된다는 후기가 있을 정도로 그 시큼한 맛이 일품이라는 것이다. 구소련국뿐이랴. tvN의 여행다큐 백종원의 스트리트 푸드파이터 하얼빈 편에서 소개된 홍차이탕(红菜汤)만 봐도 중국까지 뻗친 보르쉬의 전파력을 알 수 있다.

스트리트 푸드파이터 하얼빈편에 등장하는 홍차이탕(  (사진 제공 : 박은주 /출처 : 유튜브 캡처)

서울에서는 더울 기미가 조금씩 보였던 작년 초여름, 나는 친정엄마와 5살 아이와 함께 키르기스스탄의 어느 깊은 산속 산장에 머물고 있었다. 고도가 3000미터가 넘는 그곳은 우리가 도착하고 나서부터 종일 비가 내렸다. 여름이라고 얇은 옷 떼기만 잔뜩 챙겨 왔는데, 숙소가 습하고 추워서 친정엄마와 5살 아이는 바람막이와 모자, 손수건으로 중무장을 한 뒤 온열기를 배에 끼고 유튜브를 보고 있었다.

키르기스스탄 산장 속 친정엄마와 주원이  (사진 제공 : 박은주)<br>
키르기스스탄 산장 속 친정엄마와 주원이  (사진 제공 : 박은주)

나는 방을 나와 심란한 얼굴로 신발장 앞 유아차를 들여다보았다. 산장 앞 흙길은 지나다니는 가축들의 똥과 거듭되는 비가 섞여 질퍽한 진흙탕이 되어가고 있었는데, 아침산책 때 잠깐 썼던 유아차바퀴가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신발과 바지도 온통 엉망인 데다, 날씨까지 연일 흐려 야외활동이 어려우니, 좁고 눅눅한 산장에서 하루종일 견디기가 힘들었다. 도저히 흥이 안 나던 그날 저녁, 화려한 금니로 앞니를 교체하신 키르기스스탄 주인아주머니가 벌건 국을 내왔다. 수저로 휘휘 저으니, 양파, 감자 조각이 보이는 게 바로 여행다큐에서 보았던 그 보르쉬였다. 통역을 중간에 담당해 준 친구가 특별히 부탁해 비건버전으로 맛볼 수 있었다.
"이건 먹을만하네."
입맛이 없다고 나오는 음식마다 족족 남기던 친정엄마는 앉은자리에서 따뜻한 보르쉬 국물을 모두 마셨고, 나와 아이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빨간 국물을 모두 흡수했다. 춥고 습한 산장에서 보르쉬로 몸을 데운 우리는 그날 밤 숙면했다.

이번 달 봉화 농산물꾸러미 속 비트 10알을 보니 그때 먹었던 뜨끈한 보르쉬가 생각났다. 보르쉬는 중국 하얼빈까지 손을 뻗었지만 한반도에서는 아직 생소한 요리이다. 한국은 1970년부터 조금씩 비트를 재배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비트에 대한 전통적인 조리법이 없다. 비트 자체가 색이 강렬하고, 생으로 먹으면 달지만 특유의 강한 식감 때문에 쉽게 먹히지 않는다. 비트의 효능이 밝혀지면서 착즙 하여 주스로 먹거나, 비트차로 마시거나, 비트가루로 색을 내고, 무처럼 장아찌로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비트를 주인공으로 만드는 요리는 적다.

비트를 생으로 몇 조각 잘라줬더니, 딱딱한 식감 때문에 남편이 한입 먹고 손을 놓는다. 냉장고 속 가득한 비트를 소비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인터넷 레시피를 따라 용기 내어 비건버전 보르쉬를 시도했다. 양파와 감자, 비트, 토마토를 잘게 썰어 기름을 두르고 토마토퓌레, 월계수 잎을 냄비에 넣었다. 그 후 모든 야채가 뭉근해질 때까지 뚜껑 덮고 저온으로 가열했다. 익은 야채를 국자로 눌러 섞은 후 소금과 후추를 뿌려서 완성! 자줏빛 수프는 물감을 탄 듯 강렬하다.

세계테마기행 중 키르기스스탄 산장의 보르쉬 (사진 제공 : 박은주 /출처 : 유튜브 캡처)
보르쉬가 완성되었습니다  (사진 제공 : 박은주)

"보르쉬가 완성되었습니다."

"으... 색이 너무 강해서 거부감이 든다."
남편은 주저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보르쉬에 숟가락을 넣기 시작했는데, 맛은 색에 비해 나쁘지 않다고 하며 어느새 자신의 할당량을 다 먹었다. 아이도 맛이 괜찮은지 밥을 말아 보르쉬국밥을 해 먹었다. 

보르쉬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서로 자신의 전통요리임을 주장하다가, 2022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우크라이나가 원조임이 선포되었다. 비트와 토마토가 주재료이지만 재료에 따라 다양한 변주가 가능하기에 우크라이나에만 380여 종류의 보르쉬 요리법이 있다고 한다. 보르쉬에 올려먹는 스메타나(샤워크림)도 마요네즈로 대체되기도 한다. 보르쉬는 평소에도 먹지만, 가족들이 다 모이는 자리나 결혼식이나 크리스마스 등 특별한 날에도 상에 오르는 화합의 수프다. 전쟁이 종식되어, 보르쉬를 사랑하는 모두가 각자의 가정으로 돌아가 자줏빛 빨간 수프 한 그릇씩 먹을 수 있는 날이 하루빨리 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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