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각 다른 정의 실현을 위한 다양한 가치소비자들이 존재하는 덕분에 빛나는 세상'
타인의 가치소비를 인정하고, 역할에 감사하는 '서로 사랑'으로 나의 정의도 공감받을 수 있다
[컨슈머와이드-박은주] "뉴스 봤어? SNS피드에 갑자기 떠서 봤는데 댓글 보니 사람들이 난리더라."
퇴근한 남편의 핸드폰에 뜬 뉴스에는 "음식이 아니라 폭력입니다."라는 피켓을 든 사람들이 패스트푸드점에서 시위하는 사진이 걸려있었다.
"혹시 아는 사람이야?"
사진을 유심히 보던 나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몇 년 전 내가 채식 팟캐스트를 제작했을 때 잠깐 인연이 닿았던 분이었다. 당시 패기와 열정만으로 2박 3일 비건캠프를 조직해 내는 걸 보고, 어떻게 저렇게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을까 놀랐던 기억이 있다. 한편으로는 아 저렇게 열심히 하다가는 금방 지칠 텐데... 걱정하며 바라보았는데, 몇 년이 지난 지금 DxE라는 그룹으로 탈육식활동을 하는 걸 보면 열정은 그대로인 듯했다.
"비건들은 저 시위를 어떻게 생각해?"
남편은 기사를 골똘히 들여다보는 나에게 물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지난 2011년 11월 11일 저녁 7시,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인터넷으로 찾아본 채식 모임에 나갔다.
'혹시 나에게 채식을 하라고 권유하지 않을까? 동물을 먹지 말라고 설득하지 않을까? 만약 채식활동을 강요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거나 이상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박차고 나올 거야.'
나는 일면식 없는 사람들 속에서 혼자 걱정을 하며 벌벌 떨고 있었다. 채식에 관심이 생겨서 나오긴 했지만, 채식이라는 실체를 본 적은 없었기에... 내 걱정과는 달리, 모임에 참여한 채식인들은 나만큼 민망해했다. 홍대의 어느 비건 카페에 모인 사람들은 총 10명, 20대부터 50대까지, 남자도 있었고 여자도 있었다. 처음 온 나에게 말 거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거니와, 이 모임의 주최자라는 사람조차 사람들 속에서 극히 어색해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메뉴를 골라 카운터에서 각자 계산하고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이거 비건 빼빼로예요. 오늘 빼빼로 데이잖아요. 제가 집에서 만들었어요."
어색해하는 10명이 둘러앉은 식탁에 어느 남자가 수줍게 유리 반찬통에 싸가지고 온 빼빼로를 올려놓았다.
난생처음 관찰하게 된 채식인들은 참 조용하고 숫기도 없었다. 채식에 대해서도 특별히 말하지 않았고, 서로 친한 척도 하지 않는 걸 보니 특별히 친구를 사귀려고 이 모임에 나온 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들은 카페에서 각자 시킨 음식을 천천히 꼭꼭 씹어 음미했고, 때로는 고개를 돌려 반지하 카페에 크게 나있는 창으로 밖에 비가 얼마나 오는지 관찰했다. 다들 어찌나 잘 먹는지, 각자 시킨 음식을 남긴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사람들은 서로의 연락처를 물어보는 일도 없이 한손으로 우산을 든 채 인사만 꾸벅하고는 각자 흩어졌다. 그날, 나는 채식인이 되었다.
채식한 지 2년째, 나에게는 '채식'이라는 정의가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었다. 세상은 여전히 그대로였고, 개인적으로 채식을 실천하고 있을 뿐, 동물들의 고통에 침묵하고 있는 내 모습이 답답했다. 세상을 바꿀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을 찾아다니다, 나는 생태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에 가입했다. '채식인인 나를 그 정당 사람들은 뼛속까지 공감해 주고, 세상을 바꾸는 구체적인 방법도 알고 있겠지.'라는 생각은 참으로 순진했다.
지역당 모임에 모인 사람들은 생태주의라는 공감대만 있을 뿐 각자 들고 있는 의제는 모두 달랐다. 노동, 기본소득, 농업먹거리, 지역순환경제, 화폐금융민주화, 주거, 젠더, 소수자, 청소년, 탈핵, 에너지전환 등 그동안 내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던 수많은 의제들 속에 채식이라는 키워드는 그야말로 구멍가게 같았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세상에는 수많은 정의들이 존재하며, 각자 자신의 정의를 들어달라고 외치고 있다는 것을. 내가 다른 사람들의 정의에 무지하고 무관심한 만큼 다른 사람도 내 정의에 무심할 수 있음을 받아들였고, 그렇게 나는 세상이 나의 정의, 채식에 귀 기울여주었음 하는 바람을 내려놓았다.
그렇게 바라본 세상은 놀라웠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추구하는 정의를 위해 매일마다 분투하고 있었다. 부당해고된 동료를 위해 노조를 조직한 사람, 학교 청소노동자들의 휴식권을 위해 피켓을 든 대학생들, 가난한 학생들이 교육받기를 바라며 이름 없는 기부를 해온 사람들... 물론 일상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도 일상적인 정의가 존재했다. 일회용 봉지 사용을 줄이기 위해 장바구니를 가져가는 사람, 유아차를 밀고 가는 사람을 위해 앞서서 문 열어주는 사람, 일이 몰린 동료를 인지하고 일을 나누어가는 회사원...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사람들은 저마다의 정의를 추구하며 최선을 다해 살고 있었다.
반대로 하나의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이 다른 정의에 있어서는 악에 가까운 경우도 있었다. 애견가이자 채식주의자로 동물보호법을 지지했으나, 유대인에게는 광기 어린 학살을 종용한 히틀러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히틀러는 극단적인 예지만, 나조차도 오랫동안 채식을 실천하면서, 채식인들은 모든 분야에 있어서 선함을 추구할 것이라는 편견을 버렸다.
세상이 나빠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 책 '정의란 무엇인가'가 베스트셀러에 오를 만큼 사람들은 정의로운 삶에 관심이 많다. 사람들은 종종 다른 정의에도 친절하게 귀를 기울여준다. TV를 보다가 전화로 후원을 하기도 하고, 자연을 지키기 위한 건설 반대운동에 개인정보를 제공하면서까지 서명하기도 하고, 광장에서 투쟁하는 사람들에게 지나가다 간식을 건네기도 한다. 디지털화는 정의의 실천을 보다 쉽게 했다. 최근 한 대기업이 사내 식당 입구마다 설치한 키오스크는, 사원증을 태킹 하기만 해도 1000원씩 후원할 수 있는 편리함을 제공했다. 바쁜 생활 속에서도 사람들은 공감만 된다면, 자신이 몰랐던 정의에 귀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정의가 주목받기를 바란다. 대기업 앞에서 확성기로 시위하기도 하고, 길거리에서 전단지를 나누어주기도 하고, 인권위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기도 하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패스트푸드 점에서 피켓팅을 하기도 한다. 정의의 전파 측면에서는 어떤 방법이 가장 효율적일까?
최근 서울혁신파크에서 열린 비건페스티벌에서 나는 정의의 평화로운 전파를 목격했다. 야외무대에서는 머리에 꽃을 두른 댄서들이 하와이 전통춤을 선보였고, 사람들은 넓은 잔디밭에서 셀러들에게서 산 비건음식을 여유롭게 즐겼다. 일회용품을 줄이기 위해 각자의 그릇을 가지고 온 사람들은 설거지존에서 줄 서서 자신의 용기를 세척해 재활용했고, 자신이 산 음식을 응원하고 싶은 셀러들에게 무료 나눔 하기도 했다. 잔디밭 수많은 사람들 중 나는 아이를 동반한 한 가족의 돗자리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거기에는 비건제품이 아닌 과자와 아이스크림, 젤리가 있었다. 아... 비건 페스티벌이지만 비건이 아닌 사람들도 이 축제를 즐기고 있구나. 그 사람들이 축제에서 느꼈을 평화와 즐거움을 생각하니 뿌듯했다. 추후 채식에 관심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비건을 생각했을 때 행복한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잡식하던 내가 2011년 나간 채식모임에서 느낀 침묵의 평화처럼.
채식 덕후였던 나는 이제 사람들이 채식 외의 정의에 관심이 있음에 오히려 안심한다. 내가 관심 없는 분야에 누군가는 관심을 기울여주고 있기에 세상의 모든 구석구석이 빛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수많은 정의들 사이에는 우열이 없고, 그 다양함에 감사함을 느낄 수 있을 때 비로소 다른 사람들도 내 정의에 관심을 기울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의는 사랑으로 가닿을 때 공감을 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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