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슈머와이드-박은주] "띵동"
문을 열자 거대한 꽃바구니가 덩그러니 있었다. 두 손으로 낑낑대며 꽃바구니를 들고 들어오는데, 엄마가 아이고 저 큰 걸 어쩌려고 그래 한마디 하시고는 다시 자리를 피하신다. 침대가 거의 모든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내 좁은 방에 저 거대한 꽃바구니를 어쩌나. 방을 여러 차례 둘러본 나는 일단 스킨과 로션을 모두 서랍에 때려놓고는 화장대에 꽃바구니를 올려놓았다. 비닐 포장 속 하얀 장미들이 반짝반짝 찬란했다.
알고 지내던 선배에서 연애상대로 바뀐 남자친구는 참 성실했다. 블로그를 찾아보는지, 드라마를 보는지, 의례 챙겨야 할 것으로 추정되는 기념일마다 전형적인 선물을 준비했다. 100일에는 대형 곰돌이를 낑낑대며 북적거리는 종로까지 와서 퇴근하는 나를 기다렸고, 크리스마스 때는 둘이서 절대 다 먹을 수 없는 4호 사이즈의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사 오기도 했다. 아이고, 정말로 이럴 필요는 없는데... 거대한 부피의 선물이 다가올 때마다 까마득했지만, 매번 선물을 준비한 남자친구의 성의가 고마워서 솔직하지 못했다. 선물은 필요 없고 밥 먹고 산책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하면 상처받으려나. 다음에 기회 되면 말할까. 아냐, 실망하지 않도록 일단 기뻐하는 표현을 해주자. 꽃바구니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꽃바구니와 셀피를 찍고는 남자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정말 아름다워요. 선배. 고마워요.'
연애의 문법을 성실히 따랐던 연애 1년, 우리는 조심스러웠고, 긴장했으며, 즐거워했고, 솔직하지 못했다. 앞으로도 그와 함께 할 텐데, 또 꽃다발을 사주면 어쩌지. 하지만 그 말은 끝까지 하지 못했다.
연애 3년 차가 되어 웨딩플래너 앞에 나와 나란히 앉은 남자친구는 달라져있었다. 꽃장식은 어떻게 할 거냐는 웨딩플래너의 물음에 그는 나를 쓱 한번 쳐다보더니 말했다.
"공간이 비어 보이지 않도록 꽃장식은 화려했으면 좋겠어요. 단, 테이블과 복도에 놓일 꽃장식은 모두 화분으로 할 수 있을까요? 하객들이 결혼식이 끝나고 가져갈 수 있도록요."
와... 이번만큼은 정말 놀랐다. 그는 알고 있었다. 내가 살면서 지향하는 모든 것들을. 3년의 연애를 통해 나를 면밀히 관찰한 결과였다.
"그리고 혹시 부케와 부토니아는 뿌리를 보존할 수 있을까요? 끝나고 다시 화분에 심을 수 있도록요."
식당에 가서 주문할 때 바쁜 종업원을 부르기 미안해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참 답답한 성향의 나를 대신해 남자친구는 웨딩플래너에게 우리가 그리는 공존의 웨딩을 이야기했다. 귀신같이 내 속을 꿰뚫고 있는 그가 신통방통하고, 한편으로는 한없이 든든해서 테이블 아래 남자친구의 손을 꼭 잡았다.
화분까지는 가능할 것 같지만, 뿌리 있는 부케와 부토니아는 전례가 없던 일이라 플로리스트와 상의해 보겠다던 웨딩플래너는 결국 우리의 바람을 존중해 주었다. 결혼식날 테이블과 복도에 놓였던 수국화분은 하객들의 두 손에 들려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았고, 나와 남편을 빛나게 해 주던 부케와 부토니아는 친정엄마의 손에 다시 화분에 심어져 무럭무럭 자랐다.
들판의 꽃은 좋지만, 꽃다발은 싫었다. 꽃다발이 되기 위해 꺾이는 그 순간, 꽃의 생명에도 카운트다운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꽃병에 꽂아놓아도 꽃은 안다. 자신의 수명이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꽃에 대한 낭만적인 감정을 빼더라도 꽃다발은 참 활용도가 떨어진다. 한 평의 흙도 주어지지 않는 콘크리트 아파트에 살기에, 시든 꽃은 아름다움이 사그라든 순간 흙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쓰레기로 전락하여 종량제봉투에 담길 수밖에 없다. 꽃을 보존하기 위해 거꾸로 매달아 말리더라도, 결국 먼지가 쌓이면 다시 쓰레기가 된다. 낭만보다 실용이 우선인 사람들을 위한 비누꽃다발도 있다지만, 막상 비누꽃다발에서 한 장씩 뜯어다가 손세척을 하자니 작품을 망치는 이상한 기분도 든다.
"짠! 받아요. 대파."
"아니 이걸 왜 꽃다발 주듯이 주냐고!"
"아니, 뭐 대파 주는 방법이 따로 있나."
드라마 '멜로가 체질'의 배우 안재홍이 울적한 천우희의 집을 방문해 뒷짐에서 대파다발을 내미는 장면이 있다. 농담과 낭만의 경계를 오고 가는 대파다발은 입맛 없는 천우희에게 맛있는 대파떡볶이가 되어 위로가 된다. 꽃이 아닌 대파에도 실용을 겸비한 낭만을 충분히 깃들일 수 있는 것이다.
드라마에서만 존재할 것 같은 야채다발을 실제로 쓴 경우도 있다. 2022년 괴산에서 열린 세계유기농산업엑스포의 성과보고회에서는 표창장 대상자들에게 괴산지역에서 나는 유기농 야채들로 약간은 투박한 야채더미를 내밀었다.
10년 전 공존의 결혼식을 꿈꿨던 우리는 대안을 모색했지만 꽃장식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부케와 부토니아의 뿌리를 살리기 위해, 뿌리가 잠시 허공 속에 있더라도 강인한 생명력을 잃지 않는 다육이와 난초를 선별해야 했다. 테이블장식의 수국을 위해 플라스틱 화분값을 치러야 했다. 채소도 꽃 못지않게 빛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지금, 그때를 회상하면 조금 덜 번거로울 수 있는 아이디어들이 샘솟는다.
다시 10여 년 전 그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소유해야 하는 식물들 대신 결혼식장의 모든 장식을 먹을 수 있는 야채들로 채우고 싶다. 테이블 장식으로는 손님들이 바로 싸갈 수 있도록 작은 생분해성 종이컵에 아스파라거스와 쌈채소로 장식한 야채 데코레이션을 하고, 부토니아로는 귀여운 당근을, 부케로는 상추와 당근을 들고 우리 둘은 다시 입장할 것이다. 그날 밤에는 좁디좁은 신혼집으로 돌아가, 부부로써 맞는 첫 끼로 결혼식을 빛내준 당근과 상추를 깨끗하게 씻어 갓 지은 밥에 된장 찍어 먹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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