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슈머와이드-박은주] '다크서클, 레이저로 해결하세요. 바로 일상생활 가능! 개원기념 여름특가 10회 OO만원!'
'다크서클'로 인터넷 검색을 몇 차례 시도한 끝에 나는 드디어 집 앞 피부과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10회에 OO만원이라, 광고만 보면 레이저로 색소침착만 해결하면 된다니 이보다도 간편한 방법이 없었다. 화장으로도 가리어지지 않는 다크서클로 거울 앞에 설 때마다 스트레스받느니, OO만 원이라... 투자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광고문구를 거듭 읽은 후, 광고모델의 시술후기를 사진으로 보니 확신도 생겼다. 그래, 다크서클을 없앨 수 있을 거야. 설령 없어지지 않더라도, 부작용이 아예 없다는데 이 정도 나를 위해 써보는 거야. 나는 그날 퇴근 후 피부과에 찾아갔다.
평소 대중교통을 타고 다니고, 외식도 안 하고, 옷도 안 사는 내가 피부과에 OO만 원을 긁게 된 데에는 엄마의 잔소리가 매우 컸다.
"너 안색이 그게 뭐니. 다크서클이 점점 짙어진다."
한 달에 한 번 친정집에 남편과 밥 먹으러 가면 신발을 벗는 입구에서부터 엄마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밥 먹을 때도, TV를 볼 때도 엄마는 몇 주만에 얼굴 보는 딸에게 할 말이라고는 다크서클 밖에 없는 듯했다. 참다못한 내가 "1절만 하시면 안 될까요?" 읍소해도 엄마의 잔소리 폭격기는 제동이 걸릴 줄 몰랐다. 친정을 한번 방문하고 나면, 그 후 일주일 동안 엄마의 잔소리가 윙윙윙 귓가를 맴돌았다.
'그래. 일단 이거라도 사자.'
마스크팩도 한번 사본 적 없는 나는 어느 날 퇴근길에 화장품가게에 들러, 다크서클 패치를 샀다. 식약처에서 인증받은 미백패치에 동봉된 광고는, 패치 안에 함유된 유효성분이 어떻게 피부 깊숙이 흡수되는지 피부 단면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매일밤 숙제 하듯이 다크서클 패치를 눈 밑에 붙이고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이면 베개 옆에 말라버린 다크서클 패치가 떨어져 있었다. 광고를 믿었고, 성실히 패치를 붙였지만, 나의 다크서클은 여전했다. 한 달 내내 유효했던 나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후에도, 친정엄마에게 또다시 다크서클 폭격을 받았을 때 나는 결심했다. 피부과 OO만원을 결제하겠노라고.

피부과를 방문했던 연예인들의 인증싸인 액자가 벽 한쪽을 메운 피부과에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클래식이 잔잔히 흘렀다. 네일아트가 돋보이는 실장님은 남색 유니폼을 입고 개별 상담실로 나를 이끌어 상세한 설명과 후기들을 제시한 후, 카메라로 나의 눈밑 피부를 찍었다. 모니터 한가득 나의 피부가 확대되어 보였다.
며칠 후 예약한 날 나는 드디어 피부과 의사와 독대하게 되었다. 환자가운을 입은 나를 침대에 눕히더니, 장갑 낀 손으로 내 눈밑 피부를 살살 만지며, "10번 정도 하시면 색소 침착된 부분이 좀 약해지실 거예요. 시작할게요."라는 멘트를 시작으로 레이저시술에 들어갔다. 레이저시술은 모기에 물리는 듯 화상을 당하는 듯 "조금 따끔합니다."라는 의사의 멘트만큼만 아팠다. 누워서 '직직 지지고 직' 소리 몇 번 나면 다 됐다 했다.
"2주 후에 다시 모실게요."
첫 진료 후 나는 피부과에서 권해준 아이크림, 피부 보습크림을 추가결제했다.

그렇게 10회의 레이저시술이 끝나자 피부과 상담실에 앉은 실장님은 시술 전과 시술 후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음, 좀 옅어졌네요. 보이시죠? 토닝레이저 10회 더 하시면 더 옅어지실 거예요. 만약 레이저가 좀 불편하시면 눈밑지방 재배치도 고려해 보실 수 있고요. 이 경우 원장님과 상담예약 잡으셔야 하고요."
"아. 네..."
안 보인다. 변화가 도저히 안 보인다. 모니터에 크게 확대된 사진에 '전'과 '후'표시가 없었더라면 나는 무엇이 전인지 후인지 구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분명한 건 내 검은 피부를 뚫고 다크서클은 여전히 선명하게 그 자리에 자신의 존재감을 뿜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3개월간 피부과에 성실히 다녔다. 더 큰 기대를 하기 어려웠다.
그 후, 나는 BB크림을 바꿨다가, 포기했다가, 또 엄마 잔소리 들으면 아이크림을 추가 구매했다가, 다크서클 패치를 사는 등 갈 길을 못 찾고 방황했다. 다행히 엄마의 잔소리는 내가 아이를 낳고 난 후 멈추었다. 다크서클이 없어져서 잔소리가 멈췄다기보다는 그저 관심이 오로지 세상에 갓 나온 어린것에 집중되었기 때문이었다. 나조차도 여자에서 엄마로 거듭나면서 여자로서 챙길 수 있는 외모는 놓아버렸다.
"어머니, 요즘 뭐 하세요? 안색이 점점 좋아지시네요."
아이가 다니는 피아노학원에 허름한 티셔츠를 입고 아이를 데리러 갔을 때, 아이의 피아노선생님이 나에게 말했다. 뭐, 학부모에 대한 아부성 발언이거나 단순 인사말일 수 있지만, 나는 문득 내 요즘 안색이 궁금해졌다. 아이를 데리고 집에 오는 길에 핸드폰을 뒤적거리는데, 내 안색을 보려고 뒤진 사진첩에는 온통 아이와 남편 사진뿐.
"주원아, 우리 셀카 찍자."
"엄마. 여기서 왜 셀카 찍어요?"
"자, 찍는다!"

나는 뜬금없이 놀이터에서 아이 옆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찰칵하고 보니 정말 아이와 나의 안색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분명 몇 년 전에는 코끝 라인까지 짙은 다크서클이 있었는데? 혹시 카메라의 보정효과 때문일까? 나는 집에 오자마자 화장실에 들어가 하얀 형광등 아래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유심히 보았다. 정말이네. 정말 다크서클이 없어졌네. 그러고 보니 정말 요 근래 몇 년 동안 그 누구 하나 나의 안색이나 다크서클을 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피곤해 보인다거나 잠을 못 잤는지 물어보는 사람도 없었다. 도대체 나의 다크서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생각해 보면 요 몇 년간 나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잠이었다. 특히 회사를 관둔 근래 1년 동안, 나는 드디어 정상적으로 잠을 자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침 나는 일어나 남편에게 외쳤다.
"여보, 나 어제 10시에 자서 한 번도 안 깼어!"
어린 시절에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숙면생활, 지난 몇 년간 그 쉬운 게 참 어려웠다. 5시간 미만으로 자고, 1-2시간 간격으로 잠에서 깨고, 때로는 집에서도 새벽까지 노트북 앞에 앉아야 했던 때에는 도저히 잠을 부르는 부교감신경을 활성화할 수 없었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밤 10시에 눈꺼풀이 스르르 내려오고, 중간에 깨지 않고 7시에 알람소리 없이도 자연스레 눈을 뜨고, 중간에 화장실도 안 가고, 심지어는 꿈도 안 꾸기.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을 내 몸이 해내고 있었다. 그렇게 어느새 레이저토닝으로도 날아가지 않던 다크서클도 자취를 감췄다.
사실 다크서클 지적을 받았던 그때 나는 알고 있었다. 매사 쫓기듯 긴장했고, 피곤했고, 제대로 자지도 쉬지도 못했지만, 해야 하는 일이 너무 많다고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당장 쉴 수 있는 여건이 안 되므로, 다크서클마저도 돈으로 해결하려 했다. 증상만 없애면 마치 문제없는 것처럼 연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이 상황을 타개할 여건도 안되고, 용기도 없으므로 나는 계속 해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지난날 다크서클로 피부과를 찾았던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동네에서 많이 만난다. 무릎 연골 통증으로 절뚝거리면서도, 통증제 처방으로 위기를 넘기는 사람, 과도한 피로와 스트레스로 축농증에 시달리면서 소염제에 기대는 사람, 성인 여드름으로 몇 년간이나 차도 없는 피부과에 다니면서도, 스트레스성 간식을 끊지 못하는 사람...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바꿀 수 없으므로 대증요법(對症療法)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돌이켜보면 나도 야근으로부터, 수많은 회의와 전화로부터 도망칠 자신이 없었는지 모른다.
지난날의 나처럼 피곤에 절어 생활하면서도 현실을 바꿀 용기가 없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누구도, 심지어 병원마저도 당신의 안녕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 진정으로 관심을 가지고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 한 사람뿐이므로 이제는 당신이 용기 내서 몸이 보내는 메시지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특히 다크서클로 나처럼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회사 일, 토익, 진급, 시험합격 등의 목표 리스트에 '휴식과 숙면'도 꼭 추가해 놓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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