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슈머와이드-박은주] "이번 시합도 대단했어. 종료 38초 전에 3점 슛이라니... 조마조마했지 뭐야."
슬램덩크 열풍이 불던 지난 2023년, 엄마는 우연한 기회에 농구구단의 시니어요원으로 발탁되었다. 평소 농구와 먼 삶을 살아온 엄마는 임시직으로 고용해 준 기업에 감사한 점이 참 많았다. 이 나이에 엄마를 뽑아줘서, 출근하면 점심을 줘서, 커피와 과자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섹션이 마련되어 있어서, 농구단체응원복을 줘서, 회식을 시켜줘서, 가족초대혜택을 줘서, 응원단장을 마주칠 수 있어서... 회식이라면 피할 생각부터 하고, 단체복을 나누어주면 회사이벤트가 끝나자마자 옷방에 처박아버리던 나의 지난 회사생활을 떠올리니, 일을 대하는 엄마의 태도는 경이로웠다.

관중들이 모두 자리를 찾은 후, 일하는 내내 서서 간간히 농구경기를 보던 엄마는 2개월 만에 농구에 푹 빠져들었다. 구단의 농구선수들의 장단점을 파악하는 건 물론이고, 감독의 경기 운영전략의 변화, 상대구단의 선수의 특징 등 정말 모르는 게 없었다. 일주일에 많아봤자 두세 번 일하는 엄마는 쉬는 날 우리를 만나게 되면 농구 이야기에 여념이 없었다. 슬램덩크는 커녕 운동경기에 관심이 없는 나를 대신해, 남편과 친정아버지가 엄마의 농구이야기에 동참해 줬다.
기나긴 7개월의 시니어요원 알바일정이 끝나고 난 후, 구단에서는 원하는 사람에게 원정경기 티켓을 주겠다고 했다. 아르바이트비도 주지 않는데, 아무도 가지 않을 거라는 나의 추측은 오산이었다. 10명의 시니어요원은 모두 가겠다고 했고, 엄마는 아빠를 설득해 아빠의 스타렉스로 10명을 모두 실어갔다. 차로 1시간이나 걸려 도착한 경기장에서, 시니어들은 목소리가 쉴 때까지 목청 높여 응원했다. 마지막 경기였고, 엄마가 일하던 팀은 졌다. 돌아오는 길, 친정아빠의 스타렉스에 탄 시니어들은 제 일인 양 풀이 죽었고 슬퍼했고 아쉬워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엄마의 농구구단을 향한 사랑이었다. 농구구단은 그저 엄마에게 단기임시직에 준하는 알바를 제공했을 뿐이었다. 물론 이번 이런 엄마의 모습은 처음이 아니었다. 엄마는 사랑할 대상이 생기면, 곧바로 몰입해서 제 열정을 불사를 때까지 사랑했다. 젊은 날부터 그랬다. 락(Rock)이, 가수 김추자가, 케니 지가, 북한산이, 가수 김경호가, 자전거가, 스포츠댄스가, 산티아고가... 대상만 정해지면 엄마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영혼을 모두 끌어모아 사랑할 대상에 집중했다. 친구도, 자녀도, 배우자도, 반려견도 모두 잊고 오늘이 삶의 마지막 날인양 사랑을 불살랐다. 이 깊은 몰입 앞에서, 나는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심장'없는 양철나무꾼처럼 '어떻게 저게 가능하지?'라며 엄마를 관찰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 어떤 대상도 깊이 사랑해보지 못했다. 좋아하게 된 대상이나 사물이 있긴 했지만, 그 감정은 스쳐 지나갈 뿐 나의 일상은 온전히 유지되었다. 참으로 재미없게 살아온 내 앞에, 나와 비슷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가 그동안 몰입했다고 볼 수 있는 대상이라고는, 중학교 때 카세트테이프를 구입한 변진섭과 신승훈, 이승환이 다였다. 그와 나의 연애는 평온했다. 특별히 좋아하는 게 없는 우리는 일주일에 1번씩만 만나 영화 보고, 밥 먹고, 커피 마시고, 해가 지기 전 헤어지곤 하다가 적당한 시기를 골라 결혼했다. 잠실역의 늦은 저녁,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고 레이저를 발사하며 싸우는 연인들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왜 저런 적이 없지?' 의문을 품었다.
시종일관 무덤덤하던 그가 변한 건, 산부인과에서 아이가 태어난 첫날부터였다. 갓 아기아빠가 된 그는 도통 웃지 않았고, 3.5킬로 아기가 잘못될까 봐 잔뜩 긴장했다. 임신기간 동안 태담 한 번 해본 적 없고, 초음파사진 한번 감수성 있게 바라본 적 없는 그는, 간호사에게 기저귀 가는 법과 아기를 안아 트림시키는 법을 배우더니, 병원에서 합숙하던 2박 3일 내내 매우 진지한 얼굴로 아이의 제1보호자 역할을 충실하게 해냈다.
물건을 잘 떨어뜨려 핸드폰 액정에 금이 가 있는 나를 믿지 못한 그는, 웬만하면 내가 아이를 안는 일을 만들지 않으려 했다. 자신이 아이를 들어 모유수유쿠션에 올렸고, 모유수유하는 내내 아이가 잘못될까 매의 눈으로 내 옆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2시간 30분마다 알람을 맞추고 수유텀을 조절하였고, 간호사에게 받은 종이에 수유시간을 기록하였다. 퇴소하던 날, 남편은 인터넷에서 주문한 가장 두툼한 겉싸개로 아기를 싸더니, 아무것도 없는 병원복도에서 아이를 안고 있는 자신이 설령 넘어지기라도 할까 주춤거리며 반걸음씩 걸었다. 애 낳은 지 3일도 채 되지 않아 뒤에서 캐리어를 끌며 어기적거리며 걷는 나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낯선 남편의 모습에 기시감이 있었다. 그건 바로 내가 어릴 적 키우던 개가 출산을 한 뒤, 자기 새끼가 혹여 잘못될까 봐 주인의 접근에도 으르렁 거리던 모습이었다. 세상 누구도 아기를 해하지 못하게 그는 온몸으로 아기를 안았다.

그는 훗날 말했다. 아이를 본 첫날, 그 아이를 사랑하게 됐노라고. 생모인 나조차 벌건 아기가 생소하고, '엄마'라고 불리우는 게 어색하기만 한데, 그는 아기가 울 때면 말도 못 알아듣는 신생아를 보며 말했다. "여기 아빠가 있어. 괜찮아. 다 해결해 줄게."
아이는 아빠의 사랑을 받고 무럭무럭 컸고, 남편은 자신의 모든 취미생활을 내려놨다. 어느 날 내가 아이 옆에서 낮잠 자다 깨 피곤해 보이는 남편에게 물었다.
"다음 생이 있다면 또 아이를 낳아 키울 거야?"
"수박이를 만나본 이상, 또 만날 수 있다면 그래야 하겠지."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는 아이를 만나 로맨틱한 발언도 서슴지 않게 변해갔다. 늘 미지근한 마음으로 살아온 나는, 아이와 남편이 서로 사랑하는 모습에서 사랑을 배우게 되었다. 남편과 아이가 양철나무꾼이었던 나에게 심장을 준 오즈의 마법사인 셈이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인생고락을 겪으면서 우리는 얼마나 담담해지려고 노력하는가. 기쁨도, 슬픔도 무뎌지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그렇게 사랑에도 무뎌지고, 새로운 대상을 사랑하는 건 더 어려워진다.
최근 임영웅의 축구장 팬심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임영웅을 사랑해서, 축구경기를 끝까지 관람하고, CD를 수십 개를 사고, 해외공연투어를 한다. 그렇게 임영웅을 사랑한다고 임영웅이 어디 자신의 이름이라도 하나 외워주나. 무언가를 받기 위해 사랑하는 게 아니다. 사랑하는 행위 자체가 행복해서 하는 거다.

사랑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설령 그 사랑이 일방적일지라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를 보살피는 행위와 농구를 향한 팬심은 모두 사랑할 수 있는 기회다.
누구보다도 어렵고 각박한 성장배경을 뚫고, 엄마는 결국 행복해졌다. 그런 엄마의 뜬금없는 농구구단 사랑 앞에서 나는 엄마의 생존비결을 읽었다. 그건 바로 '사랑할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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