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슈머와이드-박은주] "별로 배가 안 고파서 저녁은 생략했다."
집에 돌아와 냉장고 속 잔반량을 체크하자, 남편이 말했다. 저 큰 덩치가 분명 저녁을 안 먹고 이 시간까지 배부를 리 없는데... 이상하다 생각하며 주방을 확인하는데 미처 버리지 않은 라면봉지 꼬다리가 있다. 에크... 해놓은 반찬은 꺼내지도 않고 또 라면 먹었구먼.
라면 외에도 간이 센 요리를 선호하는 남편은 신혼 때 가끔 김치찌개를 끓여줬다. 군대 전경시절 부식비로 식사당번을 하며 여러 번 단련된 실력이었다. 식초만 조금 더 부었을 뿐인데 감칠맛이 났다. 둘이 좁디좁은 신혼집에 조그만 간이탁상을 펴놓고, 남편 노트북으로 동영상을 보며 밥 위에 김치찌개를 얹어먹노라면, 이게 신혼집인지 친구자취방인지 헷갈렸다.
남편의 김치찌개는 아기의 탄생과 함께 사라졌다. 세상은 아기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김치찌개의 자리는 브로콜리고구마현미죽, 단호박퓌레, 감자완두콩죽 등으로 채워졌다. 어떤 집은 어른이 먹을 반찬과 아이가 먹을 반찬을 각각 준비한다거나, 아이가 자고 난 후 배달음식으로 허기를 보충한다는데, 우리는 그럴 여력이 없었다. 아이가 먹기 적합한지가 식탁을 결정했던 지난 6년간, 고춧가루가 들어간 모든 음식은 집에서 사라졌다.
심심하고 담백한 입맛에 길들여져 김치도 먹지 않았던 나날들, 별말 없이 잘 먹기에 남편도 나처럼 입맛이 아이 따라 변한 줄 알았다. 그런데 아뿔싸. 남편이 흘린 라면봉지 쪼가리가 말해주고 있었다. 남편은 그저 아이의 식단을 견디고 있었다는 것을... 남편 따로, 아이 따로 요리하지 않고 모두 행복한 요리방법은 없을까 고민하던 어느 날, 놀이터에서 어떤 꼬마가 빨간색 봉지과자를 먹고 있는 걸 발견했다. 떡볶이맛을 재현했다는 그 과자는 분명 고춧가루가 함유되어 있었는데, 김치도 못 먹을 저 어린아이가 매운 줄도 모르고 열심히 먹고 있었다. 불량식품을 먹고 있는 동네아이가 한편으로 딱하면서도, 식품 제조업자의 실력에 감탄했다. 엄마도 못 먹이는 고춧가루를 어찌 가공했기에 아이에게 먹일 수 있나.
그 후로 나는 마트에서 빨간색 과자만 보면 사지도 않을 거면서 성분표를 유심히 확인하기 시작했다. 매콤 달콤한 맛으로 추정되는 과자 뒷면에는 대부분 '핫스위트테이스트파우더', '매콤달콤한맛시즈닝', '고추장베이스-1' 등 합성성분으로 표시되어 있어 구체적인 원료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유일하게 해태제과의 '신당동 떡볶이'과자가 원료를 구체적으로 명기해 놓았는데, 의외로 고춧가루가 직접적으로 들어있었다.
유아가 먹을 수 있는 안 매운 고춧가루는 무엇인가. 내가 첫 번째로 시도한 것은 파프리카가루였다. 동네 어린이집에서 깍두기 담글 때 파프리카가루를 쓴다고 들었는데, 막상 구입하려고 보니 마트에서는 순수 파프리카 가루를 사는 게 의외로 어려웠다. 시중에 유통되는 파프리카분말은 육류나 해산물에 뿌리는 시즈닝으로 옥수수가루와 포도당, 거기에 스모크향까지 함유된 인공향신료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시중 마트에 없는 순수 파프리카분말은 온라인 약초전문쇼핑몰에서 구할 수 있었다. 일반 고춧가루보다 1.5배는 더 비싼 파프리카 가루로 응용한 첫 번째 요리는 버섯볶음이었는데,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한 후 파프리카 가루를 뿌리니 음식의 풍미가 확 살아났다. 그러나 깍두기를 담가보니 고춧가루에 세뇌된 내 입맛에는 아쉬운 감이 있었다.
두 번째로 시도한 것은 '어린이 고춧가루'. 이 또한 시중마트에서는 구할 수 없었다. 남편과 나는 꼬투리가 살짝 매운 오이고추에도 배신감을 느끼는 사람들이라, '안 매운 고춧가루', '순한 고춧가루'라는 제품설명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텃밭농사 2년 차인 내가 알기로, 고추는 다른 품종과의 교잡이 매우 쉽다. 분명 오이고추라고 심었는데, 옆에 청양고추밭이 있다면 우리 오이고추가 정말 안 매운 고추로 남을지는 따보기 전까지 모른다. 파프리카도 아니고 어떻게 고추가 안 맵다는 보장이 가능할까. 이미 어린이 고춧가루를 사본 맵찔이 선배님들의 리뷰를 수차례 읽고 난 후, 나는 그제야 어린이 고춧가루를 구매했다. 아는 농부님께 이 안 매운 고춧가루의 실체에 대해 문의드리니, 오이고추도 빨개지면 매워지는데, '금패황양각초'등 빨개져도 안 매운 고추품종이 따로 있다고 한다. 그래도 철저히 교잡이 되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하는 건 맞다.
알고 보면 생산에 정말 많은 노고가 필요한 어린이 고춧가루가 우리 집에 도착했다. 봉지를 열고 코를 들이미는데, 알싸한 고추향이 팍 풍긴다. 오이고추처럼 우리를 배신하는 거 아냐 의심하며 빨간 콩나물무침을 했다. 매운맛에 매우 예민한 6살 아이의 밥상에 뻘건 콩나물무침이 올라갔고, 나는 아이의 입에 그 뻘건 콩나물무침이 들어갈 때 숨을 살짝 멈췄다. 와~ 저렇게 뻘건데 아이가 두부 먹듯이 콩나물무침을 먹네. 리뷰는 거짓말이 아니었어. 나는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남편과 아이 둘 다 먹을 수 있는 어린이 고춧가루를 획득한 후, 나의 요리는 날개를 단 듯 자유로워졌다. 고춧가루 때문에 하지 못했던 요리들이 이렇게 많았던가. 비건닭갈비, 떡볶이, 빨간 야채볶음, 김치겉절이, 깍두기... 그리고 드디어 주말에는 1번씩 라면을 먹어야 한다는 남편을 고려하여, 남편과 아이가 함께 먹을 수 있는 라면까지 시도하게 되었다. 파와 고춧가루를 기름에 볶고, 거기에 간장과 후추, 소금만 뿌렸을 뿐인데, 그 국물에 라면사리를 넣으니, 관대한 남편이 시중 라면맛이 난다고 먹어준다. 물론 그 빨간라면을 아이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먹는데, 그 모습이 보고도 신기하다.
어린이고춧가루를 만난 순간, 시중에 파는 어떤 자극적인 음식도 두렵지 않아졌다. 안 매운 고춧가루만 첨가했을 뿐인데 MSG 뺨치는 자극적인 맛으로 아이와 남편이 둘 다 함께 먹을 수 있는 건강한 음식을 만들 수 있다니, 어린이 고춧가루 너 참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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