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치료라는 최악의 상황을 내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것들로 채우다 보면, 생에 경험하지 못한 최고의 상황으로 반전 시킬 수 있지 않을까 ... 베트남 종주를 시작으로 캄보디아와 태국까지 35일간의 동남아 배낭여행은 이렇게 시작됐다

작가 문성민 
작가 문성민 

[컨슈머와이드-문성민] 방사선치료가 한창 진행중이었던 2018년의 2월. 치료가 끝나면 하고 싶은 것들을 정리해서 버킷리스트를 만들었다. 매일 병원에 다니며 체력과 감정 모두 땅 속으로 곤두박질 칠 때였다. 가능하든 가능하지 않든 희망적인 무언가를 붙잡고 살아가고 있었다. 내가 받았던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는 감사하게도 횟수가 정해져 있었다. 그래서 우울한 생각 대신, 종료 후 하고 싶은 것들을 생각하는 시간으로 하루를 채우곤 했다.

내 버킷리스트의 많은 부분은 여행과 관련되었다. 세계일주, 동남아 배낭여행, 산티아고 순례길, 각국의 미식여행 등등. 가장 빨리 실현 가능할 항목을 먼저 골라냈다. 그것은 바로 ‘동남아 배낭여행’이었다. 방사선치료를 받고 돌아오면 축 쳐진 몸을 소파에 뉘이기 바빴다. 가만히 누워 자유롭게 여행하는 나를 상상하다 보면 어느새 가족들이 퇴근해서 집에 들어오곤 했다. 그때부턴 내가 앞으로 갈 여행지를 가족들에게 소개하며 신나게 떠드는 시간이 되었다. 덥고 습한 동남아 도시의 이곳저곳을 직접 배낭을 매고 걸으며 여행할 나를 상상하며 떠들었다. 가발까지도 내팽개치고 자유롭게 다닐 나를 말이다.

영화 ‘버킷리스트’의 포스터. 이 영화 개봉 후 하고 싶은 계획을 이르는 의미로 버킷리스트라는 말이 두루두루 쓰이게 되었다 (사진 제공 : 문성민)
영화 ‘버킷리스트’의 포스터. 이 영화 개봉 후 하고 싶은 계획을 이르는 의미로 버킷리스트라는 말이 두루두루 쓰이게 되었다 (사진 제공 : 문성민)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야근과 스트레스가 많은 개발자가 되었다. OECD 국가 중 멕시코 다음으로 노동시간이 많은 국가에서 태어난 숙명으로 자연스럽게 성실히 일했다. 새벽에 퇴근했지만 상사의 꾸지람이 걱정돼 씻고 바로 출근하는 신입시절을 버텨냈다. 상사에겐 당연한 일이었고 내게도 당연한 듯이 요구됐다. 3일 이상의 휴가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연말이면 휴양지에서 느긋하게 휴가를 보내는 다른 나라 사람들이 참으로 부러웠다. 암진단을 받기 직전 1,2년간 주변에서 과로사 소식이 심심치 않게 들려왔었다. 허리디스크로 옆 파트 직원분이 사무실에서 쓰러져 엠뷸런스가 온 적도 있다.

일에 쫓겨 ‘나’를 챙기지 못하고 데드라인에 임박했을 때 알아차리는 상황을 간접적으로 경험했다. 암에 걸린 이유를 확실하게 꼽을 순 없지만 내 직업환경이 원인의 일부이지 않을까. 미련하게 버텨낸 덕분에 암에 걸렸고 부러워하던 한달 이상의 의도치 않은 휴가도 얻어냈다. 싫지만 좋은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왜 그렇게 여행이 가고 싶었을까 생각해 보니 외부활동이 줄어들어 답답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기운이 없어 집에 있던 시간이 많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럽고 두려워 나가지 않기도 했다. 내가 처한 상황을 얘기하면 비참해질 것 같아 입을 닫는 날도 많았다.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있어 누군가 아무 이유 없이 쳐다보면 시선의 이유를 마음대로 생각하고 곱씹게 되던 때였다. 가발을 쓴 모습은 늘 어색하고, 모자를 쓰고 있으면 왜이리 환자 같은 건지... 나는 '한시적인 피해망상자'였다.

동남아 배낭여행을 다닐 때 나의 모습. 가발을 벗고 배낭 하나만 매고 다녔다  (사진 제공 : 문성민)
동남아 배낭여행을 다닐 때 나의 모습. 가발을 벗고 배낭 하나만 매고 다녔다  (사진 제공 : 문성민)

우리나라를 벗어나 해외로 가면 가발을 쓰지 않은 덥수룩한 내 머리를 개성으로 받아들여 줄 것 같았다. 타인의 시선과 원치 않는 조언이 줄어든 곳에서 마음껏 돌아다니고 마음껏 먹는 행복한 날들이 상상됐다. 방사선 치료를 받던 기간 동안 여행 생각만 해도 즐거웠다. 여행을 갈 수 있을지 확신할 순 없었다. 하지만 활기차게 마음껏 걸으며 여행하는 나를 생각하면서 우울한 날이 점점 줄어들었다.

3월 중순 방사선치료가 종료되자마자 바로 7월 하노이행 항공권을 구매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부터 매년 한차례는 해외로 가족여행을 떠났는데 여행지는 나의 제안에 엄마와 동생의 동의해주는 곳으로 정했다. 여러 차례 검색을 통해 배낭여행의 첫 도시로 하노이가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하노이로 가면 몇 년째 엄마가 가고 싶다고 하시던 하롱베이까지 여행할 수 있어서 가족 모두의 바람이 해결되었다. 

나의 인도차이나 반도 여행 동선. 하노이 – 달랏 – 무이네 – 호치민 – 시엡림 – 방콕 – 치앙마이 (사진 제공: 문성민 / 출처: 구글맵)
나의 인도차이나 반도 여행 동선. 하노이 – 달랏 – 무이네 – 호치민 – 시엡림 – 방콕 – 치앙마이 (사진 제공: 문성민 / 출처: 구글맵)

15일간의 베트남 종주를 시작으로 캄보디아와 태국까지 인도차이나 반도의 3국가를 두 발로 뚜벅뚜벅 거닐며 여행했던 35일간의 동남아 배낭여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암환자라는 최악의 상황을 내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것들로 채우다 보면, 생에 경험하지 못한 최고의 상황으로 반전시킬 수 있지 않을까.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벅찬 기대와 희망으로 부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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