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걷기'를 통해 삶의 가치를 깨달아 간다

작가 문성민 
작가 문성민 

[컨슈머와이드-문성민] 지난 11월 '한라산'을 올해의 마무리 산행지로 정하고 등반계획을 짰다. 나는 보통 3시간 내외로 끝나는 서울의 쉬운 산을 등반하는 스타일이다. 이런 내가 한라산을 가겠다는 것은 큰 맘 먹고 저지르는 일이란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높다는 산을 오르면 날마다 깎이는 자존감의 내년치 할당량을 채울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나는 한라산으로 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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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마음으로 계획한 한라산 등반은 날씨, 컨디션 등의 이유로 시작 전부터 삐걱 거렸다.

일정 일주일 전, 제주에 폭설이 내렸다. 11월 중순, 소설(小雪)을 앞두고 있었던 때라 기온도 영하권으로 떨어졌다. 갑자기 두려움이 밀려왔다. 추위에 덜덜 떨며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못하고 있을 내가 상상되니, 머릿속은 걱정으로 한가득 찼다. 항암치료 이후 추위에 약해져 있는 나는 좋은 컨디션 유지와 첫 한라산 등반을 위해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다. 털모자, 장갑, 핫팩, 히트텍, 텀블러 등 보온에 필요한 용품들과 쌓인 눈을 대비해 아이젠과 스패츠를 챙겼다. 이렇게 집에서 챙겨갈 것들의 준비를 끝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복병이 나타났다. 제주도로 떠나기 3일 전 PMS(Premenstrual syndrome, 월경전 증후군)가 시작됐고 날짜를 계산해 보니 하필 한라산 등반일이 월경통이 가장 심할 것으로 예상됐다. 산티아고 순례길 이후 날짜가 2,3일씩 틀어지기 시작한 월경주기가  위험요소가 되어 버렸다.  30분 쯤 실의에 빠져 속으로 욕만 해댔다. '이런... 가야 되는데, 어떻게 준비했는데, 얼마나 가고 싶었는데, 어떻게 내가 준비하는 일은 평탄하게 되는 게 하나도 없네...' 

이렇게 있다보니 '이왕 결심했으니 시작은 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내 몸이 보내는 체력저하의 신호를 인위적으로 바꿔보기로 했다. 비상시에 경찰이 신호등의 신호를 바꿔주듯 에너지를 주입하기로 결정하고 약국으로 돌진했다.

"에너지 부스터 있나요?"

"체력이 많이 떨어지세요?"

"아뇨, 장시간 등산하려고요"

"저도 등산할 때 챙겨 먹는 비타민앰플이랑 마그네슘 액상제가 있는데 보여드릴까요?"

"네! 주세요!"

약사님은 마그네슘이 근육 긴장하는 걸 방지해 주고 피로도 줄여준다며 권해줬다.  하루 전, 등산 전, 등산 후 3번 복용하면 다음 날 가뿐하게 일어날 거라는 설명도 해줬다. 건네 받은 약에 손을 얹고  '등산할 때 기운이 한껏 나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했다. 이제 정말 한라산 등반을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났다.

관음사 탐방로 안내판 (사진 제공 : 문성민)
관음사 탐방로 안내판 (사진 제공 : 문성민)

제주에 도착했다. 제주의 따뜻한 기온을 느끼고 있자니 한라산에 한걸음 다가온 것 같아 안심이 되면서 설렜다. 본격적인 등반일 전까지 일몰과 일출, 곶자왈 등을 여행하고 제주를 미리 느끼며 긴장을 풀었다. 특히 1년 내내 푸르른 곶자왈을 걸을 때는 미리 한라산의 일부를 걷는 것 같아 얼마나 멋진 풍경을 보여줄지 산행이 기대됐다. 같이 올라가기로 한 지인과 아침 5시 반에 만나기로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힘들 걸로 예상은 되지만 사고 없이 다치지 않고 둘 다 완등하기를, 날씨운이 따라줘서 안개도 없기를 기도하며.....

드륵드르륵... 스마트폰 알람 소리에 잠이 깼다. 기분 좋을 정도의 긴장감 덕분에 눈이 번쩍 뜨였다. 계획했던 시간보다  늦어져 채비를 다 끝내고 나니 6시. 6시 반에는 관음사 탐방로에 도착해야 하는데 ...자동차로 한 시간 걸리니 7시에나 도착할 판이다.  삼각봉 대피소의 진입제한시간 안에 들어갈 수 있을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안절부절못하는 나에게 옆에서 지켜보던 지인이 "괜찮아. 할 수 있어"라고 격려의 말을 건넸다. 지인의 마음이 전해졌는 지 내 마음이 차분해 졌다.  그래, 시간 안에 못 올라가면 다음에 오면 된다. 얼마든지 다시 올 수 있는 곳이니까 가다가 기운 빠지고 퍼지면 일단 쉬자.

준비한 장비, 간식 등을 챙겨 탐방로 입구를 바라보니 여기까지 온 게 실감이 났다. 비타민 앰플과 마그네슘 액상을 들이키며 기합을 넣고 7시에 산행을 시작했다. 부스터 덕분인지 기력이 올라오면서 자신감도 함께 생겨났다.

탐방로의 초반은 나무데크 길의 평탄한 길로 가볍게 시작되었다. 나뭇잎은 대부분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었는데 나무 아래쪽으로 늘어져있는 조릿대들이 푸른색을 간직하고 있었다. 나무와 암석에 수북이 낀 이끼도 한몫했다. 까만 현무암 지형이라 푸르름이 더 돋보였다. 두 개의 탐방로 중 어렵다고 소문난 관음사 탐방로를 선택한 건 산행과 동시에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 때문이었다. 나는 걸으며 사색하는 걸 좋아하는데 풍경까지 더해지면 아름다운 그림 속 한 인물이 된 느낌을 받는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푸른색, 검은색, 하얀색, 초록색, 우중충한 갈색들 사이로 내리쬐는 햇볕까지 완벽한 풍경화였다. 가파르더라도 관음사로 오기로 한건 올바른 선택이었다.

눈쌓인 한라산 등반로 (사진 제공 : 문성민)
눈쌓인 한라산 등반로 (사진 제공 : 문성민)

 

올라가기 시작한 지 한 시간쯤 지나니 탐라계곡 화장실에 도착했다. 완만해서 쉬운 길은 이미 지났고 이제부터는 삼각봉 대피소까지 가장 어려운 난이도의 길만 남았다. 미리 챙겨 먹은 진통제가 잘 듣는지 월경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번 등반을 시작하기 전에 쌓여있던 걱정들은 한껏 오른 컨디션 덕분에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사라져 갔다. 잠깐의 휴식을 마친 후 기분이 상쾌해지니 가뿐하게 올라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어 다시 오르는 길이 즐거워졌다. 

고도가 올라가면서부터 입김이 나올 정도로 기온이 내려가 아래쪽엔 없던 눈이 보이기 시작했다. 등산화를 신었지만 길에 흙보다 눈의 비중이 많아지면서 길이 미끄러웠다. 장비의 도움을 받아야 할 순간이 왔다. 아이젠과 스패츠를 장착했다. 발은 조금 더 무거워졌지만 안전함과 기술력은 한껏 높아져 쭉쭉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늘어난 무게와 가팔라진 오르막길은 나를 헉헉대게 했다. 바로 그 때, 3명의 서양인이 아이젠과 스틱 없이 운동화만 신고 긴 다리를 뻗으며 성큼성큼 올라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나를 제치고 앞서 빠른 속도로 치고 나가자 실망하기 보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예전의 나였다면 이런 상황에서 경쟁심으로 무리하게 속도를 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따라갈 수 없는 걸 동경하고 따라가기 보다 내 속도로 가는 편이 안전한 선택이란 걸 이미 깨달은지 오래된 터라 내 능력껏 안전하게 다시 걸으며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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