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인세호 (채문사 대표)

[칼럼니스트-인세호] 2022년 11월, 가족들과 함께 일본을 방문했다. 2020년 3월 9일부터 실시된 미즈기와 대책 (해로를 통해 습격하는 적이 상륙하기 전에 물가(水際)에서 퇴치한다는 의미로, 전염병 등 바이러스의 국내유입을 차단하는 조치) 이래 2년 8개월, 반올림하여 3년 만에 찾은 일본은 우리가 알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그중 우리 한국인이 느끼는 제일 큰 변화는 카드로 결제할 수 있는 곳이 대폭 늘어났다는 점이리라.

지하철을 탈 때도, 김밥 한 줄을 먹을 때도 카드 한 장이면 해결되는 한국에 사는 내 지갑 속에는 현금이라고는 붕어빵을 사 먹거나 로또를 살 수 있는 정도밖에 들어있지 않다. 그런 감각으로 일본 여행을 갔다가 낭패를 보는 사람도 제법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은 워크맨, 휴대전화, 게임기 같은 최신 전자기기를 만들어 내는 나라가 아닌가. 그 기술력을 보면 당연히 모든 곳에서 카드를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사진 제공 : 인세호)

사실 일본 사회는 근본적으로 아날로그다. 실시간으로 온라인 계좌 이체를 할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했다는 것이 2018년의 빅뉴스 중 하나였고, 코로나 팬데믹 와중에는 은행, 관공서 등에서 여전히 팩스로 일 처리를 한다는 도시전설 같은 실화가 SNS에서 화제가 되었다. 밀레니엄도 20년이 지났는데 팩스라니….

이처럼 평생 변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일본이 변한 이유는 무엇일까? 두 가지를 꼽자면 한 가지는 2020 도쿄 올림픽이고, 다른 한 가지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겠지만 전 세계를 휩쓴 코로나 팬데믹일 것이다.

한국시간으로 2013년 9월 8일, 올림픽 유치에 성공한 이후 일본 정부는 올림픽에 대비한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2016년부터 1년마다 갱신되는 「도쿄 2020 액션&레거시 플랜」에 따라 2016년 10월부터는 간접흡연 방지 대책을 강화하여, 음식점 등의 서비스 업종에서는 건물 내 흡연을 금하였다. 세단이 주류였던 택시는 2017년부터 신형 JPN 택시,즉 외국인이나 장애인이 타기 쉬운 미니밴 차량으로 교체되기 시작했다.

한편, 2014년 12월에는 내각관방을 비롯한 정부 6개 부처에서 「캐시리스 (Cashless, 현금이 아닌 신용카드, 체크카드나 전자 화폐를 이용하는 것)화를 향한 방책」을 발표했다. 그중 한 가지 화제가 방일(訪日) 외국인의 편리성 향상이다. 일본 관광청의 조사에 의하면 외국인 관광객 중 16.1%가 카드를 사용할 수 없는 곳이 많아 불편했다(https://paymentnavi.com/paymentnews/47598.html)고 지적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2014년 일본의 캐시리스 결제 비율은 16.9%(https://news.cardmics.com/data/cashless2014/)에 불과했다. 2018년 시점에는 일본 정부의 각종 시책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여, 일본 내 캐시리스 결제의 비율은 20%에 머물렀다. 4년 동안 4%도 늘어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된 2020년의 캐시리스 결제 비율은 29.7%로, 팬데믹이 종식된 2022년에는 36%로 성장하여, 팬데믹 이전에 비하여 거의 두 배로 늘어났다.

그렇다면 팬데믹을 겪으면서 성공적으로 '현금 없는 일본'이 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 숫자를 보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보이지만, 내역을 살펴보면 그렇지도 않다. 팬데믹 동안 3밀(밀폐, 밀집, 밀접)을 피하기 위한 온라인 쇼핑의 성장에 힘입어 결제 비율이나 이용액은 증가했으나. 오프라인 점포에서의 캐시리스 결제 비율은 높지 않기 때문이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과소비에 대한 불안, 개인 정보 관리에 대한 불안, 관리 편의성을 생각하면 현금이 낫다고 한다. 사업자 중 30%는 높은 수수료율 (업종에 따라 다르며, 대략적인 수수료율은 음식점 5%, 소매점 4%, 백화점 2%, 편의점 1%)과 입금까지 걸리는 시간 때문에 캐시리스 결제를 도입하지 않으며, 도입했어도 메리트가 없다(https://www.watch.impress.co.jp/docs/series/suzukij/1488000.html)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캐시리스는 빠르고 편하다'는 주장과는 달리 사실 편하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고 리스크만 높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결국 일본은 변한 듯 보이지만 여전히 현금이 주류인 나라이다. 팬데믹이 종식된 2022년의 일본 카드 업계는 2021년에 비해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https://gyokai-search.com/3-card.htm#jump2-2).

금전의 흐름을 파악하여 세수를 늘리고 싶은 정부 입장에서는 속이 타들어 갈 상황일 것이다. 2025년까지 정부가 목표로 한 캐시리스 결제 비율 40%를 달성하기는 어렵지 않겠으나 실생활에서 현금이 없어도 된다고 느끼기는 당분간 힘들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근년에는 대지진과 태풍, 이상기후 등이 예상치 못한 피해를 주고 있다. 2011년의 동일본대지진까지 거슬러 가지 않더라도, 칸사이 국제 공항을 고립시킨 2018년 여름의 태풍 21호, 북해도 전체가 정전된 2018년 가을의 이부리 동부 지진, 2019년 치바현에 막대한 피해를 끼친 태풍 15호와 태풍 19호, 당장 손에 꼽을 수 있는 재해만으로도 이 정도다. 재해가 파괴한 인프라 복구에는 긴 시간이 걸리며, 정전과 시스템 장애는 캐시리스 결제를 무력화시킨다. ATM이나 카운터가 다운되어 손에 쥔 현금으로만 거래하는 모습이 보일 때마다 동전과 천 엔짜리 지폐가 최고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정부와 업계는 캐시리스가 CO2 배출량을 줄이는 가치소비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인프라가 있다고 가정했을 때의 이야기다. 다양한 재해를 겪으며 살아온 일본 사람들은 고집스러울 정도로 견고함과 안정성을 중시할 수밖에 없다. 빨라 보여도 오히려 느린 변화를 거부하고, 답답해 보여도 착실한 일상을 보내는 그들은 미래를 바라보는 우직지계(迂直之計, 가까운 길을 곧게만 가는 것이 아니라 돌아갈 줄도 알아야 한다는 뜻)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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