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인세호 (채문사 대표)
칼럼니스트 인세호 (채문사 대표)

[칼럼니스트-인세호] 일본은 동조 압력이 강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비즈니스 문서의 서식은 물론 개인 편지의 형식도 정해져 있고, 회사의 면접은 물론 자녀의 유치원 입학 면접에서 입는 복장도 대개 정해져 있다. 어떠한 틀이 제시되면 거기에 맞추는 것을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성향이 있는 것은 확실하다.

반면 일본인들은 개인을 중시하는 성향이 강하다는 말도 있다. 파니에로 치마를 한껏 부풀린 로리타(소아성애적인 의상이 아닌, 관념적인 유럽 아가씨의 의복을 기조로 한 미학적, 회고적인 패션) 드레스를 입고 지하철을 타도 그러려니, 누가 혼자 식사를 해도 그러려니 하는 것을 보면 그 말도 맞다.

언뜻 보면 상반된 듯 보이는 두 가지 일본인 상(像)은 일본인들의 인식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칼럼니스트 아라카와 카즈히사가 실시한 일본인 의식 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약 90%가 ‘일본인은 집단주의다’라고 대답하고 약 50%가 ‘나는 개인주의자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https://toyokeizai.net/articles/-/422892). 즉, 각각은 개인주의자지만 전체로 보면 집단주의라는 기묘한 결과가 된다. 대체 어떻게 이런 결론이 나올까.

사실 이것은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라,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철칙처럼 지키는 태도를 생각하면 금방 납득할 수 있다. 바로 ‘민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라는 태도다. 내가 자신의 의지로 어떤 행동을 해도 남들과는 무관하나, 자신의 개인성이 다른 사람을 침해하는 민폐 행위는 용납되지 않는다. 여기서 민폐를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범죄에 해당하지는 않으나, 타인 혹은 집단에 해가 되는 행위이다. ‘우치(안)’와 ‘소토(밖)’을 구분하는 일본 사람들의 특성으로 말하자면 ‘소토’를 의식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피부에 와 닿는 예로 유무형의 퍼스널 스페이스를 침범하는 행위를 들 수 있다. 남의 팔을 건드리거나 발을 밟는 등 타인의 신체라는 물리적인 퍼스널 스페이스를 침범하는 행위, 대중교통 안에서 통화를 하거나 벨 소리가 울리는 등 공간적인 퍼스널 스페이스를 침범하는 행위가 모두 이에 해당한다. 그래서 조금만 콜록대도 다른 사람의 건강에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마스크를 쓴다. 성인 여성이 화장하지 않은 얼굴을 마스크로 가린다는 이해할 수 없는 ‘민폐’도 있긴 하다. 아무튼, 일본인은 민폐 행위를 저지르면 (때로는 타인의 민폐 행위에 휘말렸을 때조차) 곧바로 ‘스미마셍’이라고 사죄의 말을 꺼낸다.

그럼, 이처럼 자신과 타인의 퍼스널 스페이스를 존중하는 인식이 전체에 공유된 사회는 과연 개인적일까 집단적일까? 이렇게 생각하면 상술한 조사의 ‘각각은 개인주의자지만 전체로 보면 집단주의’라는 결과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또, 거리를 다니다 보면 일본인 각각이 개인주의자라는 말이 과연 맞는지 의문이 생긴다. 일본에서는 전철이나 버스를 타면 기사나 역무원이 휠체어 승객을 위한 발판을 꺼내는 장면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동물원 근처의 전철역에 가면 역무원이 견학 온 유치원생들을 선생님들과 함께 인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엘리베이터에서는 유아차나 휠체어 이용자가 먼저 탑승하고 누구나 기꺼이 문을 열어준다. 식당에 가면 의자를 빼고 그 자리에 휠체어나 유아차를 둘 수 있게 한다. 많은 호텔에서는 신체가 불편한 손님에 맞추어 설계된 유니버설 디자인 객실을 일반 객실과는 별 차이 없는 가격에 이용할 수 있다. (특히 손님이 끊긴 코로나 팬데믹에 유니버설 디자인 객실을 확보한 호텔이 많다) 개인 점포에서도 유아차나 고령자를 동반한 손님은 우선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때도 종종 있다.

이케부쿠로 루미네의 유아 휴게실 (사진 제공 : 인세호)
이케부쿠로 루미네의 유아 휴게실 (사진 제공 : 인세호)

별 신기한 것을 다 민폐라고 생각하면서 이런 건 괜찮다고? 노키즈존이 횡행하고 지하철 공사까지 휠체어 이동 승객을 거부하는 작금의 사태를 보면, 일본인들이 이런 손해(?)를 어떻게 기꺼이 감수하는지 궁금해진다. 일본인은 계산적이고 개인주의적이라는데, 그들은 타인으로 인하여 내가 양보해야 하는 상황을 민폐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앞에서 이야기했듯, 이들이 생각하는 민폐는 타인 혹은 집단에 해가 되는 행위이다. 이 말을 바꾸어 보면 타인 혹은 집단에 해가 되는 행위가 아니면 민폐가 아니라는 말이 된다. 그래서 집단의 조화를 흐트러뜨리지 않는, 혹은 집단의 이득이 되는 행위에는 기꺼이 동조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계산의 결과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사람이라도 개인주의를 고수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

호텔체인 토요코INN의 유니버설 룸  (사진 제공 : 인세호)
호텔체인 토요코INN의 유니버설 룸  (사진 제공 : 인세호)

보통 일본에 갈 때는 대개 많은 사람이 오가는 번잡한 곳이 목적지이기 때문에, 며칠 있다 보면 '스미마셍'이 입에 붙는다. 아마도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의 절반 정도는 스미마셍일 것이다. 이것도 민폐고 저것도 민폐라니, 한국 사람의 사고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 많긴 하다. 그래서 일본은 갑갑한 사회라고, 융통성 있고 정 많은 한국이 최고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정도 융통성도 지극히 개인적인 잣대로 좌우된 ‘우치(안)’에만 적용된다.

하지만 일본에 가면 어디에 가도 유아차를 끈 부모와 어르신이 보인다. 길거리에서도 레스토랑이나 카페에서도,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물론, 애니메이션 숍에서도 ‘그들’을 만나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다. 사실 한국에 있다가 해외에 나가면 이런 것이 무척 이질적으로 보인다. 내가 가는 곳에서 마주친 그런 사람들을 우리가 아닌 ‘그들’이라고 칭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이런, 결국 나도 ‘우치(안)’와 ‘소토(밖)’를 구분하고 있지 않은가. 팔이 안으로 굽어서 팔꿈치로 남을 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겠다. 

저작권자 © 컨슈머와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