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안우빈

[칼럼니스트-안우빈] 추상성은 행동을 통해 보다 명확하게 구체화된다. ‘행복’은 뜬구름잡는 소리처럼 들리지만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맛있는 걸 먹는다, 푹신한 침대에 몸을 뉘인다, 쏟아지는 별빛을 바라본다.’는 훨씬 뚜렷하고 이해하기 쉬운 표상이다. 추상적인 단어가 와닿기 위해서는 어디까지나 사람의 행동을 거쳐야 한다.

가치소비 역시 마찬가지다. ‘가치관’이나 ‘윤리’는 하나의 관념에 불과하지만 ‘어떤 기업의 물건을 산다, 사지 않는다.’라는 행동을 통해 사람들은 보다 쉽게 가치소비에 대해 논할 수 있게 된다. “당신은 가치소비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하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곤란하지만, “최근에 사고 싶었는데 기업 때문에 의식적으로 사지 않은 물건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보다 쉽게 대답할 수 있다.

언어는 담론의 장을 열어준다는 측면에서 중요하다. 수천 년 전부터 존재했던 ‘요즘 애들’이란 말은 ‘MZ세대’라는 단어를 통해 새롭게 생명을 얻었다.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다.’고 말하면 소위 말해 ‘꼰대’소리를 듣기 십상이지만, ‘MZ세대는 버릇이 없다.’고 말하면 새로운 인문학적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설문지를 만들거나 인터뷰 질문을 만들 때 단어를 하나하나 고심하는 이유가 있다. 같은 의미더라도 언어가 조금 달라지는 것만으로 얼마든지 다른 결과와 대답을 이끌어낼 수 있다. 

가치소비 역시 언어의 측면에서 재고될 필요가 있다. 다음 질문을 생각해보자. “환경을 보호하고 싶으십니까?” 이건 가치규범적으로 옳은 일이니 사람들은 긍정할 것이다. “환경을 보호하는데 도움이 되는 제품을 사용하실 의사가 있으십니까?” 일상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된 ‘제품’이 들어간 순간부터 사람들은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환경 보호는 아득하지만, 그걸 위해 내가 사용해야 하는 제품을 바꿔야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업사이클링(Upcycling) 제품을 사용하실 겁니까?” 이제 질문을 받는 사람은 소비자가 되어 꼼꼼히 따지기 시작한다. 쓰레기, 폐품에 대해 막연히 부정적인 생각이 드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두팔 벌려 환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혹은, ‘업사이클링’이 의미하는 바를 알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사용하는 제품의 일부를 조금 더 친환경적이며 후손들을 위해 지구를 지키는 제품으로 바꿀 의향이 있으십니까?”라는 질문에 부정의 답을 내어놓기란 어렵다. 결국은 다 같은 친환경적인 업사이클링 제품에 대한 가치소비인데도 어떻게 언어로 표현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가치소비’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뭔지 모르는 사람이라도 ‘겉멋이 든 어려운 단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소비 행태 중 하나인가보다.’하고 짐작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뜻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소비자에게 물건을 하나라도 더 팔아보려는 마케팅 용어’라고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더 합리적이고 현명한 소비자가 택하는 소비 방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가치소비를 어떻게 언어화할 것인지, 어떤 행동으로 규정할 것인지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고, 다뤄야 하고, 논의해야 한다. 제품을 구매하는 것이 아닌 기업의 가치관을 구매하는 것이라 표현해도 되는지, 친환경과 비건을 동일하게 취급해도 괜찮은지, 우리는 끊임없는 질문을 해야한다.

‘가치소비’라는 추상성 아래 우리는 동상이몽(同牀異夢)을 하고 있던 걸지도 모른다.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 들어있는 의미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똑같은 이유로, 어떤 사람은 한 기업의 제품을 불매하고 어떤 사람은 한 기업의 제품을 구매한다. 추상과 실제의 간격을 메꾸는 가장 적절한 언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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