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과학사 속 창조(創造) 진화(進化) 논쟁사 ⑤
[컨슈머와이드-오경숙 한국창조과학회 본부장]
◆ 맺음말
과학은 지성에만 의존하는 지식에 불과하며, 여러 가지 종류의 지식 중 하나일 뿐이다 (박형룡, 2016 <자연과학으로부터의 반기독교적 유추> p. 41 한동수 역, 서울: 한국기독교사연구소). 이러한 과학에 절대 권위를 부여한 것이 과학주의적인 해석이다. 과학주의란 실재에 대한 지식은 오직 과학에서만 나오며, 자연과학에서 유래한 실증적 지식에 기반한 주장만이 공적 기관이 보증할 수 있는 유일한 주장이라는 것이다 (황을호 역. 2019, <과학, 과학주의 그리고 기독교.>p. 34, J.P. Moreland(2003). Philosophical Foundations for a Christian Worldview. 서울: 생명의말씀사). 과학을 종교의 위치까지 그 위상을 높여 놓고자 하는 것이다(임준섭, 2018, “죽산 박형룡의 과학관에 근거한 현대 과학주의 비평과 종합”, 「개혁논총」 p. 223). 과학주의는 철학이지 과학이 아니다(황을호, 2019, p. 72). 과학이라는 학문에 보이지 않는 신을 넣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과학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까지 신을 제외하고 설명하기 시작한 움직임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비진리라는 ‘과학주의’를 낳게 된다. 결국 신 없이 내가 가진 과학이라는 도구로 나 혹은 과학이 신이 되어, 보이는 대로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대로 설명하기 시작한다. 결국에는 진화되었다는 상상이 사실로 둔갑하고 마는 것이다.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갈 것은 과학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을 비진리라 정의 내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다윈의 진화론의 배경에는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으로 이어지는 과학의 발전이 일부 과학주의로 치우친 데에 있을 것이다.
과학은 현대 산업과 삶에 긍정적인 공헌을 했지만, 나의 시작과 삶의 목적 그리고 무엇보다 죽음 이후에 대한 답을 주지 못한다. 그 해답은 오직 말씀에서만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유일한 피조물이다(창세기 1장26절, 27절).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인간은 귀하게 여김받을 가치가 있다. 그러나 과학주의는 기독교의 유신론적 세계관을 위협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의 근간을 흔들었으며, 더 나아가 과학주의의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력은 결국 인간의 기본적인 존엄성마저 위협한다는 면에서 심각하다(임준섭, 2018,“죽산 박형룡의 과학관에 근거한 현대 과학주의 비평과 종합”, 「개혁논총」, 46. p.223-250). 일부 신학자들은 창세기를 포함하여 성경은 사람이 기록했기 때문에, 단지 사람의 작품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창세기는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 반면에, 사람이 생각해낸 진화론은 과학적 사실이고,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람이 생각해낸 이론은 ‘사람의 작품’이다. 성경은 그 자체가 그렇지 않음을 선포하고 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디모데후서 3장16절)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데살로니가전서 2장13절).
우리는 과학으로가 아니라 말씀을 기반으로 한 믿음으로 세상의 시작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히브리서 11장3절). 믿음은 모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실체이고(히브리서 11장1절), 지식의 시작이며, 구원의 이르는 길이다(디모데후서 3장15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