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과학사 속 창조(創造) 진화(進化) 논쟁사 ④

스코프스 재판

2024-10-15     오경숙
 오경숙 한국창조과학회 본부장 (이학박사/물리학)

[컨슈머와이드-오경숙 한국창조과학회 본부장]

◆ 스코프스 재판 (원숭이 재판)

1900년대 가장 큰 창조·진화 논쟁으로 꼽자면, 1925년 스코프스 재판(Scopes Trial, 일명 원숭이 재판)을 들 수 있다. 1959년 다윈의 「종의 기원」발표 후 미국에도 진화론은 수십 년 동안 과학에 영향력을 끼쳐오고 있었다. 많은 이들은 세속적 진화론이 의미하는 '창조론은 종교적 도덕적 암시'라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또한 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도록 강요하였다. 이에 대한 반대 반응으로 테네시주를 포함한 몇 개의 주들은 공립학교에서 인간이 동물 조상들로부터 진화했다고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새롭게 조직된ACLU(American Civil Liverties Union, 미국시민자유연맹, 인본주의협회)의 지도자들은 다윈주의적 자연주의에 기초한 완전히 세속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로서, 그들은 이 법안을 바꾸기를 원했다(John D. Morris. 2007. 스코프스 재판을 되돌아보며 (A Look Back at the Scopes Trial), Retrieved from, http://creation.kr/Debate/?idx=1293641&bmode=view). 스코프스 재판은 그것에 대한 첫 번째 재판이었다.

 클러렌스 대로우(Clarence Darrow, 좌)와 윌리암 제닝스 브라이언 (William Jennings Bryan, 우). /Photo Credit: CORBIS/Bettmann)

ACLU측은 몇 개의 테네시주 신문들에 그 법안을 시험하길 원하는 선생님을 찾는다는 광고를 실었다. 테네시 주 데이톤(Dayton)이란 작은 마을의 실업가들은 그들의 지역사회가 사람들의 주목을 끌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고, 존 스코프스(John Scopes)를 권유하였다. 스코프스는 생물학 교사는 아니었지만, 가끔 대리로 가르치고 있었다. 그는 실제로 진화를 언급했던 기억을 생각해내지 못했으나, 그가 체포된 후에 그 법을 확실히 위반한 것으로 하기 위해서 변호사들은 그가 한 학생에게 개인적으로 진화를 말한 것으로 각색하였다(John D. Morris. 2007. 스코프스 재판을 되돌아보며 (A Look Back at the Scopes Trial), Retrieved from, http://creation.kr/Debate/?idx=1293641&bmode=view). 아이러니컬하게도, 스코프스가 가르쳤다는 진화의 증거라고 주장되던 것들은 순수하게 과학적인 것들이 아니었다. The New Yorker 에 따르면, “스코프스의 교과서는 우생학을 기초로 하여 ‘정신박약자’들을 제거할 것을 요구하였다”는 내용이었다(Anonymous 2006, p.83; Stephen Caesar, 2006).

7일간의 열띤 공방전이 오고 갔으며, 재판의 시작은 스코프스 교사가 테네시주 교육법상에 유죄인가 하는 문제에서 시작하였지만, 피고측의 변호사들은 피고인에 대한 무죄성을 변론하기 보다는 진화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데 더욱 열을 올렸다. 예를 들면 그들은 “스코프스 교사가진화론을 가르쳤습니까?” 라는 질문조차도 전혀 없었으며, 스코프스의 위법행위에 대하여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당연히 재판의 진행은 진화론에 대한 정당성 문제로 확산되어, 이는 스코프스 교사의 위법문제에 대비하였던 기소자측을 적지 않게 당황시켰다. 재판 과정에서 변호인측이 몇 가지의 증거들을 제시하였는데, 그들이 제시했던 증거들은 오늘날에는 오히려 진화의 허구성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그 증거들은 보면, 흔적기관, 태아(헥켈)의 배, 그리고 인류화석인 네안데르탈인, 호모에렉투스인, 필트다운인, 네브라스카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등이었다(R.M.Cornelius 외. 2005. 원숭이(스코프스) 재판과 브라이언의 변론(Scopes : Creation on Trial), Retrieved from, http://creation.kr/Debate/?idx=1293591&bmode=view).

재판은 진지하고 복잡한 질문들로 이어졌다. 특히 일곱째 날에 열띤 질문과 대답은 감정적인 분위기와 함께 재판의 절정을 이루었는데, 나중에 피고측 변호인은 성경의 무오성 문제까지 확대시켜 나갔다. 예를 들면, 뱀은 하나님이 기어다니라고 저주하기 전에 꼬리로 걸어 다녔습니까? 가인은 어디서 아내를 구하였습니까? 지구가 얼마나 오래되었습니까? 얼마나 많은사람들이 3500~5000 년 전에 이집트와 중국에서 살았습니까? 라는 식의 질문이었다(Cornelius 외, 2005). 전제적으로 창조·진화 논쟁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다.

포성과 함께 시작하였던 '스코프스의 재판'은 피고 스코프스에게 유죄 판결과 100달러의 벌금형이 내림과 함께 막을 내렸다. 하지만 추후에 벌금형조차도 무효화되었고, 이 재판의 결과 미국의 일곱개의 주에서 연달아 비슷한 법적 논쟁을 일으키게 하는 발단이 되었다. 더욱이 이 재판은 1960년대까지 미국 고등학교 생물 교과서에 진화론을 크게 강조하지 않았던 당시의 추세에 큰 영향을 끼치는 계기가 되었다(Cornelius 외 2005).

1933년에는 교육의 아버지로 불리는 존 듀이(John Dewey)가 신으로부터의 해방을 주장하며 국공립학교에서 기도와 성경을 없애는 데에 주력하였다. 이러한 흐름에 기름을 부어준 것이 1925년에 있었던 스코프스 재판이 1960년에 영화로 패러디된 것이다. 이 영화는 당시의 상황을 극화시키며 기독교계가 과학계를 탄합하는 스토리로 만들어졌다 (Stephen Caesar. 2006. 스코프스 원숭이 재판에 관해 밝혀진 몇 가지 사실들(Some Facts about the Scopes Monkey Trial), Retrieved from, http://creation.kr/Debate/?idx=1293636&bmode=view). 안타까운 것은 이 영화가 미국에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가장 큰 영향으로 1963년 당시 미국의 대통령인 존 F. 케네디에 의해 헌법에 ‘종교로부터의 자유’를 명시하게 되었고, 공교육에서 진화론만 교육하도록 지시하고 기독교적 가치관을 제도적으로 제거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기독교 국가였고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의 중심을 이루었던 영국에 이어 당대 과학과 기독교의 중심을 이루던 미국마저도 공교육에 진화론이 들어가며 대세는 완전히 진화론이 자리 잡게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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