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과학사 속 창조(創造) 진화(進化) 논쟁사 ③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옥스퍼드 논쟁

2024-10-14     오경숙
 오경숙 한국창조과학회 본부장 (이학박사/물리학)

[컨슈머와이드-오경숙 한국창조과학회 본부장]

◆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옥스퍼드 논쟁'

창조·진화 논쟁의 가장 핵심은 다윈이 1859년 「종의 기원」을 출간한 다음 해인 1860년의  '옥스퍼드 논쟁'이다. 사실 진화론을 제기한 사람은 다윈이 처음이 아니다. 종은 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신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하고 적응한다는 생각은 그 이전에도 여러 차례 제게 되었다(이충호 역, 2019, p. 120). 그 중에 라마르크(chevalier de Lamarck)의 용불용설에 대한 주장은 사용하지 않으면 퇴화하고 사용하면 발달한다는 이론이다 (이충호 역 <과학사 대논쟁 10가지> p. 120, 핼 헬먼 저 (1999), 도서출판 가람기획:서울, 2019). 획득형질은 후손에 전달될 수 있다고 믿었다. 기린이 높은 곳의 먹이를 먹다가 목이 길어졌고, 후손에게 유전되면서 점점 먹이 길어졌다는 견해이다. 다윈의 할아버지인 에라스므스 다윈(Erasmus Darwin) 역시 그러한 주장을 폈다. 그의 책에는 원숭이에 서 사람이 되었다고까지 남겼다(이충호 역 <과학사 대논쟁 10가지> p. 120, 핼 헬먼 저 (1999), 도서출판 가람기획:서울, 2019).

 1860년에 진화론을 놓고 논쟁을 했던 윌버포스 주교와 '다윈의 불독' 토마스 헉슬리

다윈의 종의 기원의 자원이 된 탐사는 1831년 해양관측선인 비글호에 탑승할 기회를 얻어 5년간 항해에 동행하며 여행지의 동식물을 관찰하는 기회가 되었다(이충호 역, 2019, p.120). 비글호의 선장은 로버트 피츠로이(Robert FitzRoy)였다. 그는 성경을 매우 면밀히 읽었으며, 인류의 이동과 천문학에 대한 관찰을 통해, 창세기는 신뢰할 수 있고, 역사적으로 정확하며, 문자 그대로 진실되다는 것을 확신하였다(Nicos Kaloyirou, 2019. 비글호의 훌륭했던 선장, 로버트 피츠로이 : 일기예보의 선구자,Retrieved from, http://creation.kr/Peoples/?idx=2071156&bmode=view). 비글호의 항해의 목적은 남미 연안의 해도를 작성하기 위함인 것과 남아프리카 대륙 남단에 위치한 티에라 델 푸에고(Tierra del Fuego)에 세 명의 푸에고 원주민을 그들 고향 땅에 귀향시키는 것이었다(Lavallee, 2003). 이 세 명의 원주민은 영국에서 신교육과 복음을 받아들였으며, 고향으로 돌아가 교육하고 선교를 하고자 하였다(Louis Lavallee, 2003. 비글호의 항해-창조주를 위한 봉사, (The Voyage Of The Beagle -In The Creator's Service), Retrieved from, http://creation.kr/HistoryofEvolution/?idx=1290029&bmode=view).

다윈은 박물학자로서 동행하였으며, 비글호가 방문하는 낯선 곳의 다양한 동식물을 연구하고 꼼꼼하게 관찰하고 기록했다(정인경 외 <고등학교 과학사> p. 112, ㈜씨마스: 서울, 2019). 이러한 방대한 관찰기록들은 훗날진화론 연구의 토대가 되었다. 비글호 여행에서 다윈을 가장 사로잡은 것은 갈라파고스 제도에서의 관찰이었다. 19개의 섬마다 그곳에 사는 거북과 핀치 생의 모습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관찰한 것이다(정인경 외 <고등학교 과학사> p. 112, ㈜씨마스: 서울, 2019). 5년간의 긴 비글호 여행을 끝내고 1836년 고향으로 돌아온 다윈은 여행하며 수집한 자료와 방대한 문헌들을 정리하며 학계에서 지질학자며 생물학자로 서서히 명성을 쌓아가고 있었다. 다윈은 이미 알려져 있던 동식물의 육종 방식에서 인위 선택이라는 현상을 통해 새로운 종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자연현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생명의 종 다양성 역시 선택과정을 거쳐 새로운 종이 생겨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정인경 외 <고등학교 과학사> p. 113, ㈜씨마스: 서울, 2019).

1859년 다윈의 「종의 기원」이 발표된 다음 해인 1860년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개 진화론 논쟁이 펼쳐졌다. 이 모임은 영국학술협회(British Association)에 의해 개최되었으며, 약 1천명 정도의 꽉 찬 청중이 참석했다. 당시 다윈의 대변인이며 불독이라고 알려진 생물학자 헉슬리(Thomas Henry Huxley)와 윌버포스(Samuel Wilberforce) 주교가 진화와 창조진영 대변인으로 등장했다(이충호 역 <과학사 대논쟁 10가지> p. 125, 핼 헬먼 저 (1999), 도서출판 가람기획:서울, 2019). 과학 논쟁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서사시적 사건 중의 하나가 시작되었지만, 자세한 내용은 미스터리와 혼란에 뒤섞여 있다. 그 결과 그 사건에 대해 말하는 사람마다 제각각의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윌버포스는 '만약 누가 동물원의 유인원이 자신의 조상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면 얼마나 불쾌하겠는가' 하고 지적했다 (이충호 역 <과학사 대논쟁 10가지> p. 125, 핼 헬먼 저 (1999), 도서출판 가람기획:서울, 2019). 당시 저명한 천문학자이며 박물학자인 존 러벅은 다윈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였고, 비글호의 선장이자 뉴질랜드 총독을 지낸 바 있는 로버트 피츠로이 제독은 일어서서 성경을 흔들면서 모든 진리의 근원이 바로 성경이라고 주장했다(이충호 역 <과학사 대논쟁 10가지> p. 125, 핼 헬먼 저 (1999), 도서출판 가람기획:서울, 2019). 이 논쟁에서는 증거들이 실제로 진화론을 뒷받침하지 않았으며, 누가 이겼는지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윈과 헉슬리의 추종자들은 후에 승리를 주장하였다 (Andrew Sibley, M.S. 2017. 다윈주의를 격렬히 비판한 비글호의 선장, 피츠로이(FitzRoy, Captain of the Beagle, Fierce Critic of Darwinism), Retrieved from, http://creation.kr/HistoryofEvolution/?idx=1290092&bmode=view)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제대로 다루지 못했던 인간의 진화 문제와 때로는 생존에 그다지 유리하지 않는데도 가지고 있는 종의 형질 문제에 대해서는 ‘인간 유래와 성 선택’을 통해 성 선택이라는 또 하나의 선택이 존재함을 들어 설명하려했다(정인경 외 <고등학교 과학사> p. 114, ㈜씨마스: 서울, 2019). 다윈의 진화론은 단순한 생물학 지식을 넘어 하나의 세계관과 철학이 되었으며, 사회 전반의 사상과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정인경 외 <고등학교 과학사> p. 114, ㈜씨마스: 서울, 2019). 무엇보다 다윈주의를 인간계의 진화와 약육강식에 적용한 사례가 등장했다. 유럽의 제국주의를 정당화한 스펜서의 사회 진화론이나 다윈의 사촌인 골턴의 우생학, 갈의 골상학 등은 인종 차별 및 성차별의 과학적 근거로 삼으며 많은 사회적 혼란을 초래하였으며, 나치에 의한 홀로코스트의 주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정인경 외 <고등학교 과학사> p. 115, ㈜씨마스: 서울,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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