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과학사 속 창조(創造) 진화(進化) 논쟁사 ②

구체적인 창조진화 논쟁사..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대한 오해와 진실, 갈릴레이의 지동설과 종교재판

2024-10-11     오경숙
 오경숙 한국창조과학회 본부장 (이학박사/물리학)

[컨슈머와이드-오경숙 한국창조과학회 본부장] 이제 구체적인 창조진화 논쟁사를 살펴보자. 

 

◆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대한 오해와 진실

종교와 과학의 충돌로 보여진 과학사 속 거대 논쟁사의 시작은 과학혁명의 시작이기도 한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의 지동설일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우주 체계는 2,000년이나 유럽 사회를 지배해 온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오스의 우주 체계인 천동설을 뒤집는 주장이었다. AD. 150년 무렵에 알렉산드리아의 천문학자이자 지질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는 관찰 결과들을 설명하기 위해 지구 중심의 천문 체계를 만들어냈다 (이충호 역 <과학사 대논쟁 10가지> p. 24, 핼 헬먼 저 (1999), 도서출판 가람기획:서울, 2019). 그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정지해 있고, 그 주위를 달과 태양, 행성들과 별들이 일련의 동심구 위에서 돌고 있다는 체계를 주장하였다. 또한 모든 천체는 원 궤도를 돈다고 가정했다. 당시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는 관측되는 천체 운동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을 정도로 정밀한 최초의 체계이기도 했다  (이충호 역 <과학사 대논쟁 10가지> p. 25, 핼 헬먼 저 (1999), 도서출판 가람기획:서울, 2019).그 체계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하늘의 모습과 일치했고, 훗날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깊이 뿌리 내리게 된다. 거기에는 13세기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역할이 컸다. 예컨대 기독교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인간 중심주의는 지구 중심의 우주론과 잘 어울렸다. 천국과 지옥의 개념도 지구 중심설과 잘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이 너무 복잡하다고 여겼다. 그는

코페르니쿠스 

태양이 정지해 있고, 지구가 자전축을 중심으로 하루에 한 바퀴씩 도는 동시에 1년에 한 바퀴씩 태양 주위를 돈다고 하는 지동설을 가정했다. 지동설은 그 당시에는 너무나 엉뚱하여 아무도 믿는 사람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코페르니쿠스 자신도 그것을 증명할 수는 없었다(최인식, 2004, 갈릴레오의 재판, Retrieved from, https://creation.kr/BiblenHistory/idx=1288916&bmode=view). 코페르니쿠스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은, 그는 태양이 지구 둘레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 둘레를 공전한다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교회를 위협했던 용감한 과학자이며, 과학에 무지한 교회가 그를 핍박했다고 하는 주장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이와 다르다. 하버드 대학의 천문학자이며, 역사가인 오웬 징거리치(Owen Gingerich)는 그의 생애의 많은 부분을 역사 기록을 바르게 정립하는 데 바쳤고, 30년 동안의 프로젝트 결과를 출판하였다(데이비드 F. 코프지, 2004,루터교도들은 코페르니쿠스를 도왔다(Lutherans Helped Copernicus), CREATION EVOLUTION headlines, Retrieved from, https://creation.kr/BiblenHistory/?idx=1288914&bmode=view,  https://crev.info/2004/04/lutherans_helped_copernicus/).그 내용은 코페르니쿠스의 원고가 젊은 루터교 수학자인 레티쿠스에게 위탁되었고, 루터교인 인쇄업자에 의해서 출판되었다는 것이다. 책의 출판을 후원했던 이도 루터교도였으며, 특히 루터교의 수학자들은 코페르니쿠스의 책을 얻기를 열망하였고, 그들의 친구들에게 복사본들을 건네주며 함께 공부했다는 내용이다. 루터교도 대부분은 코페르니쿠스의 모델을 받아들였고 감사해했다고 한다. 루터교는 당대 종교개혁의 주역들이었다. 즉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대해 교회에서 핍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과는 달리 당대의 과학자들과 신학자들의 해석은 성경은 틀렸고, 지구는 변방에 불과하며, 사람은 특별하지 않다는 견해로 받아들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 갈릴레이의 지동설과 종교재판

과학과 종교 사이에 적대감을 조성한 한 가지 사건을 꼽으라고 한다면, 바로 갈릴레이가 받은 재판과 그 판결문을 꼽을 수 있다. 1616년 갈릴레이에 이르러서 그도 지동설을 주장하며, 다시 지동설이 수면 위에 올랐다. 갈릴레이는 본인이 망원경을 제작하여 천문관측에 사용하며 많은 사실을 알아내었다. 그는 1609년 인류 최초로 달의 표면을 관측하였으며, 1610년에는 인류 최초로 목성의 위성을 관찰하기도 했다(정인경 외 <고등학교 과학사> p. 69-70, ㈜씨마스: 서울, 2019). 갈릴레이의 우주 관측을 통해 우주가 천상계와 지상계로 구분된 곳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라는 인식이 확대되었다. 그러자 로마 카톨릭교회의 견재가 심해졌다. 1616년 교황청 추기경 위원회는 갈릴레이의 학문을 이단이라고 결론짓고 갈릴레이에게 그의 견해를 주장하거나 가르치지 말 것을 명령하였다(정인경 외 <고등학교 과학사> p. 70, ㈜씨마스: 서울, 2019). 

1632년 갈릴레이는 「프톨레마이오스-코페르니쿠스 두 개의 주요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라는 긴 제목의 책을 출간하였는데, 이 역시 로마 카톨릭 교회로부터 제지를 받았다(정인경 외 <고등학교 과학사> p. 69-70, ㈜씨마스: 서울, 2019).  그래서 1633년 갈릴레이는 로마 교황청으로 다시 소환되어 종교재판을 받고 유죄 선고를 받았다. 당시, 교황 우르바누스는 피사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며, 갈릴레이는 같은 피사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했다. 교황이 되기 전에는 갈릴레이 편에서 중재에 나서기도 했던 그가 교황의 위치에서 자신의 권위에 맞선 갈릴레이에게 가혹한 박해를 가했다고 한다(이충호 역 <과학사 대논쟁 10가지> p. 20-21, 핼 헬먼 저 (1999), 도서출판 가람기획:서울, 2019). 이로 인해 종교계가 과학계를 핍박한 것으로 회자되기 족했을 것이다. 문제는 성경과 천동설은 전혀 관련이 없음에도 과학은 성경보다 우월하며 종교는 과학과 분리되어야 한다는 해석으로 흐르게 된 것이다.

지동설은 그 당시의 천문학자, 철학자들의 입장과 반대되는 것이었다. 당시의 많은 교회의 지도자들도 우주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 추종자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있었고, 성경은 천동설을 가르치고 있다고 믿었기에 갈릴레이의 주장은 성경과 모순된다고 생각했다(Russell Grigg, 1997, 갈릴레이에 대한 오해 (The Galileo'twist'),Retrieved from,https://creation.com/the-galileo-twist).그들은 성경이 지구 둘레를 태양이 돌고 있음을 말한다고 생각한 몇몇 구절들을 성경에서 선택해 내었다. 모세가 “해가 돋았더라(창세기19장23절)” 그리고 “해가 진지라(창세기28장11절)”라고 기록했을 때, 그의 목적은 천문학적 관점으로 기술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세는 하나님의 영에 의해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그 당시 사람들이 말하던 표현으로 언어를 사용하였다(Russell Grigg, 1997, 갈릴레이에 대한 오해 (The Galileo'twist'),Retrieved from,https://creation.com/the-galileo-twist).  그리고 가장 편리한 기준틀로 상대적 운동을 기술하는 것은 물리학에서 완벽하게 유효한 것이었다. 명백한 의미는 태양 자체가 움직인다는 이차적인 추론을 요구하지 않고, 보여지는 현상을 언어로 완벽하게 나타낸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기상학자들이 기상예보 시에 ‘해 뜨는(sunrise)’ 시각과 ‘해 지는(sunset)’ 시각을 알려줄 때 사용하는것과 정확히 같은 것이다. 그들은 기준점을 지구로 사용하여 보여지는 현상을 표현하는 언어로 말하고 있다. 그러한 말을 편리하게 사용하였다고 해서, 기상 예보관들을 과학을 모르는 비과학적인 사람들이라고 취급하지 않듯이, 성경에 그러한 표현이 있다고 성경을 비과학적으로 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분명히 시적 표현을 의미하는 성경의 시편 19:6, 시편 93:1 과 같은 구절들은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갈릴레이는 스스로를 카톨릭 교회의 충성스러운 아들로 여겼으며, 그는 교회에 상처를 입히려는 것이 아니라, 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그는 재판 후 7년 후 1640년 눈까지 멀고 가택연금 상태에서도 “오직 성서와 신의 계시만이 우리의 경건한 요구에 답을 줄 수 있다”고 믿었던 충실한 신자였다. 즉 성경과 과학의 충돌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당시 크리스천 과학자들에 의해 지동설이 주장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신실한 크리스천 과학자들에 의해 과학은 더 발전하고 자리를 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갈릴레오의 뒤를 이어 등장한 요한 케플러는 갈릴레오의 망원경을 사용했을 뿐 아니라, 코페르니쿠스의 기존 연구를 발전시켰다. 그는 1596년 행성의 궤도가 원이 아니라 타원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정인경 외 <고등학교 과학사> p. 67-68, ㈜씨마스: 서울, 2019/ 이충호 역 <과학사 대논쟁 10가지> p. 27, 핼 헬먼 저 (1999), 도서출판 가람기획:서울, 2019). 그는 천체역학의 질서와 행성의 운동의 법칙을 발견했으며, 이는 태양계의 태양중심체계와 별의 운동을 추적하는 천체위치추산 도표를 발표하는 데까지 이르게 하였다. 케플러는 진실한 기독교인이었으며, 신학과 수학을 공부한 천문학자였다. 그는 천문학뿐 아니라 성경적 연대기를 계산하였으며, 우주의 나이는 성경 그대로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케플러는 그의 책에 “우리 천문학자는 자연이라는 책을 연구하는 지존하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다. 이러한 사고를 갖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도록 한다”라고 기록했다(이재만,2004. 요하네스 케플러, Retrieved from,https://creation.kr/Peoples/?idx=1293700&bmode=view).

우주의 체계를 정립한 뉴턴도 당시에 말씀 그대로의 하나님의 창조를 믿었다. “태양, 행성,혜성들로 이뤄진 이런 가장 아름다운 시스템은 오직 강력한 지성적 존재의 계획과 주권으로부터 만 나올 수 있다.”는 고백만 보더라도 그의 창조주에 대한 믿음이 어떠했는지 엿볼 수 있다. 그는 힘, 관성, 가속도, 중력장 이론을 밝히며 당대 과학혁명의 중심역할을 담당한다. 과학혁명은 결국 영국을 중심으로 1차 산업혁명을 일으키는 핵심이 되었다. 과학혁명 이후, 자연은 조화롭고 질서가 잡혀 있는 곳이므로 이런 조화와 질서는 수학이나기하학으로 가장 잘 표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정인경 외 <고등학교 과학사> p. 60, ㈜씨마스: 서울, 2019). 그래서 대부분의 실험 결과를 정량적인 무게와 온도, 습도와 기압의 변화로 표현하고 이를 숫자로 나타내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 각 나라에서 과학과 관련된 학회가 탄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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