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소비- 생활기] 내가 걷는 이유... 나의 첫 '한라산' 등반 ②

나는 '걷기' 통해 삶의 가치를 깨달아 간다

2023-12-26     문성민
작가 문성민 

[컨슈머와이드-문성민] 산행을 시작한 지 2시간 30분 만에 삼각봉 대피소에 도착했다. 보통 3시간 30분쯤 걸린다는 길을 한 시간이나 '일찍', 심지어 '힘들지 않게' 도착했다. 미리 겁먹을 곳이 아니었나 보다. 내 체력과 등력(登力,등산 능력)이 좋아졌나 보다.자신감이 한껏 올라 내 머릿속에서는 온갖 추측과 감정이 오고 갔다. 먼저 대피소에 도착해 쉬고 있던 지인도 걱정했던 것보다 수월하게 올라왔다며 내 생각에 공감해 줬다.  우리는 챙겨온 맛밤과 귤을 먹으며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올라온 것이 놀라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4년 전 한라산을 오르며 지쳤던 기억이 있어 이번 등반의 전날까지도 갈까 말까 고민했었다고 했다. 그간 많은 훈련을 한 덕분에 무사히, 힘들지 않게 올라왔다며 신나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 영역 밖의 일이라 생각했던 한라산 등반을 무리 없이 하고 있자니 너무 신나 하늘을 날 것 같았다. 눈 쌓인 백록담은 얼마나 멋질지 얼른 보고 싶어졌다.

 삼각봉 대피소를 지나자마자 분위기가 바뀌어 온통 새하얀 눈 세상이었다.  (사진 제공 : 문성민)

삼각봉 대피소를 지나자마자 분위기가 바뀌어 온통 새하얀 눈 세상이었다. 나무들이 양옆으로 호위하던 길은 끝났고 탁 트인 하늘과 하얗게 쌓인 눈, 저 멀리 보이는 한라산의 산세들로 즐거워졌다. 뽀드득 뽀드득... 발자국마다 귀여운 소리가 더해지니 더욱  즐거워졌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도 생겼다. 눈의 깊이가 가늠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였고 즐거움이 됐다. 스틱을 발보다 한 발짝 앞서 짚으며 얼마나 발이 빠질지 재기 시작하니 걸음은 자연스럽게 느려졌다. 걸음이 느려지니 미세먼지 하나 없는 경치를 찬찬히 볼 수 있었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를 한라산 주변의 풍경을 만끽할 수 있는 즐거움이 더해졌다. 이 얼마나 좋은 날인가!

용진각 현수교를 지나서부터 동행한 지인은 저 멀리 앞으로 사라졌다. 우리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던 경험이 있어 서로에 맞추기 보다 각자 본인의 속도에 맞춰 걷는 걸 선호했다. 이것은 서로를 위한 배려이자 존중이다. 상대가 내 속도에 맞추면 미안한 점이 생긴다. 또 홀로 걸을 때 생겨나는 사념들을 자연의 소리 속에서  정리하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이젠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소중한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한라산 백록담 (사진 제공 : 문성민)

백록담까지 남은 한 시간 반의 걸음은 오롯이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암 진단 이후 변한 나의 모습들, 올해 실천했던 모든 것들, 앞으로 그려갈 나의 모습과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해 주는 모든 사람들까지... 순간의 장면들처럼 스쳐 지나갔다. 많은 일이 있었다. 암 진단 이전에는 두려워하며 실행하지 않았던 일들을 최근 5년간 도전했다. 해야 한다는 의무감 없이 그냥 주저하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많은 도전의 첫 시작은 '걷기'였다. 전에 겪어보지 못한 속도로 갑자기 떨어지는 체력과 근육을 유지하기 위해 항암치료 기간에도 걷는 것을 매일 멈추지 않았다. 걷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나를 향한 자책과 원망, 서러움들은 해소되어 갔다. 암 발병은 나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고,  연속적으로 일어난 불행한 일들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게 되었다. 몸이 단단해지는 만큼 마음도 단단해져 갔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몸으로 느꼈다. 갈 수 있는 산, 걸을 수 있는 거리도 늘어나 행동반경이 넓어졌다.

 (사진 제공 : 문성민)

스스로에게 기특하다는 응원을 해주고 있을 때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산행로 나무의 키가 작아지고 주변 산의 산세가 보이지 않게 된 지 꽤 지난 때였다. 저 멀리 정상석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 줄지어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드디어 정상에 도착했다! 꾸준히 자연 속에서 걸으며 성장해 온 덕분에 수월하게 완등했다. 정상에 올랐다는 안도감과 해냈다는 만족감이 밀려들어 눈물이 났다. 기쁨의 환희를 누리는 사람들, 지쳐서 누워있는 사람들, 찰칵찰칵 연신 셔터를 눌러대는 소리로 정상석 근처는 소란스러웠다. 나도 그 사람들 틈에 끼어 안개 하나 없이 맑고 깨끗한 백록담을 충분히, 행복하게 만끽했다.

 (사진 제공 : 문성민)

걷기를 하기 전의 나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긴 거리를 걷는지, 올라갔다 내려올 것을 무슨 이유로 올라야 하는지, 따뜻한 집을 나가 바깥을 걷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걷기를 한 후의 나는 자연과 하나 되어 걷는 시간 속에서 배운 모든 것들이 자신을 얼마나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지 온몸으로 체험하며 살고 있다.

인간을 압도시키는 자연의 거대함 속에 있을 때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난 이토록 작은데 근심 걱정 따위도 티끌만큼 작은 것에 불과하겠지.. 이렇게 거대하고 웅장한 풍경 속의 일부가 되는 순간을 사랑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