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말(馬)이야기' ... '가죽신을 짓는 왕가의 자손'
[칼럼] '말(馬)이야기' ... '가죽신을 짓는 왕가의 자손'
  • 이정민
  • 승인 2019.11.11 14: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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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삶 설계 위해서는 '겸손'이 지혜
(사진;채널A캡처)
(사진;채널A캡처)

[컨슈머와이드-이정민] 요즘 경제가 어렵다보니 실업자, 조기 은퇴자가 넘쳐난다. 은퇴자의 고충이야 한둘이 아니지만 공통적으로 토로하는 아픔은 ‘잉여 인간’으로 전락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라고 한다. 사회적으로 더 이상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 견딜 수 없다는 것이다. 또 과거의 영화에 얽매여 새로운 삶을 설계하지 못하거나 실패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왕년에 굴지의 회사에서 중역을 했던 몸인데 어찌 허드렛일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식이다. 이 같은 허세로 애써 자존감을 지키려 들지만 실은 그럴수록 초라한 민낯이 더 드러날 뿐인데도 말이다. 
새로운 삶을 설계하기 위해서는 겸손해야 한다. 과거를 잊고 낮은 곳부터 낮은 자세로 시작해야 한다. 그러면 오히려 자존감이 회복되고 그러한 자존감으로 인해 세상을 더 따뜻하게 바라보게 된다. 왕손 출신이면서도 갖바치로 종사한 이옥견이 그런 비밀을 보여준다. 

이옥견은 조선시대 왕손이다. 그의 아버지인 흥안군과 할아버지인 한남군이 어떤 사건에 연루돼 관작을 박탈당하자 옥견은 졸지에 평민으로 전락했다. 그는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되 왕손임을 내색하지 않았다.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지자 이웃에 사는 갖바치(가죽신 만드는 장인)에게 신 짓는 기술을 배워 입에 풀칠을 했다. 말을 탈 때 신는 마상치와 그보다 목이 조금 짧은 반마상치, 양반들이 주로 신던 검정가죽신, 꺽두기라 불리는 재래식 가죽신 등 신발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기술을 배워나갔다. 사람들은 왕손이면서 체신 머리 없이 신을 짓는다며 혀를 차기도 하고 더러 비웃는 자도 있었다. 

옥견은 주변에서 비아냥대도 웃으며 대했고 그저 묵묵히 기술을 배워나갔다. 점차 기술이 정교해지자 그는 신발의 겉면에 여러 가지 장식과 문양을 더했다. 그러자 당시 장안의 명문대가집 자제들과 멋쟁이 기생들이 교류하는 화류계에서 옥견이 만든 가죽신은 명품으로 소문이 났다. 입소문을 타자 옥견의 신발값은 날개 돋힌 듯 크게 뛰었지만 주문은 계속 밀려들었다. 특히 꽃과 나비를 그려 넣은 신발은 주문이 밀려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러자 기생들이 삼삼오오 몰려와 아부하는 말을 서슴지 않으며 그의 환심을 사고자 했다. 겨우 구한 그의 명품 가죽신을 신어본 기생들은 입을 모아 감탄했다.  “한 땀 한 땀의 정교함이, 과연 이옥견의 솜씨로다”

그 후에 다시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지위가 예전처럼 회복되었다. 서인으로 폐해졌던 옥견은 다시 왕실의 작위를 되찾았다. 그는 미끈하고 때깔 좋은 말을 골라 타고 날마다 궁으로 달려가곤 했는데 가다가 길에서 신발 만들던 갖바치를 만나면 반드시 말에서 내려 절을 했다. 어쩌다 나이 든 노인을 만나게 되면 길이 진흙탕이라도 반드시 말에서 내려 큰 절을 올렸다. 그러자 신발쟁이는 당황스럽고 불안하여 멀리서 그를 보면 슬그머니 피하곤 했다. 그가 말에 오를 때면 관을 쓰고 비단 띠를 매고 다녔는데, 잘 알고 지내던 가죽신 장인을 만나면 손을 잡고 초가집에 들어가 술잔을 나누면서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시종이나 길가의 사람들이 대부분 그의 변함없는 사람됨을 의롭게 여기며 칭송했다.
옥견의 자손 중에 의성군이란 자가 있었다. 그는 학문을 좋아하고 효행이 깊은데다 바둑을 잘 두어서 사람들이 대부분 그를 추켜올렸다. 한번은 내로라하는 장안의 고수와  바둑을 두었는데 어려운 형국에서 기막힌 묘수 한방으로 전세를 뒤집었다. 그러자 구경꾼들이 탄복하여  말했다.  “하, 그 수야 말로 옥견의 가죽신 짓는 솜씨로다” 

 

(주)한국체험교육센터 이정민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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